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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마당/寸鐵活仁]愛情의 實相

늙어도 情意는 붉게 炎上한다


 

장재철
本紙 논설위원
소설가
얼마전 우연히 일본 NHK방송에서 정말 이색적이고 감동적인 '실화 드라마' 한편을 봤다. 오랫동안 남몰래 사모(思慕)해 오다가 늘그막 맺어진 인생 황혼기에서 '정다운 길동무'를 찾는 이야기.

'늦가을에 우는 꾀꼬리의 초성(初聲)'이라는 제목의 단막극(單幕劇)이었다. 일본 시고꾸(四國)의 어느 어촌 마을에 70살이 넘은 '부자 과부'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봄날밤 장성한 아들과 딸 두 남매를 자기 방으로 불러들여 말한다.

"나는 처녀때 윗마을 청년과 마음속 깊이 서로 사랑했는데 완고하신 아버지의 강권(强勸)에 못 이겨 너희들 아버지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너희들 두 남매를 낳고 서른도 채 못된 젊은 나이로 과부가 됐다. 나는 그때까지도 나를 못 잊어 홀로 사는 그 남자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어린 너희들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그때부터 사내가 된 마음으로 돌아가신 너희 아버지 몫까지 일을 해서 지금은 고을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됐고, 너희들 두 남매도 혼가를 시켰으니 내 할일은 다했고 너희들 아버지에 대한 책임도 벗었다. 그래서 이제부턴 나도 여자(女子)로 돌아가 이 집과 재산을 너희들에게 나눠 주고 지금 홀아비가 돼 늙어가는 첫 애인과 결혼을 하고 싶다. 그 집은 우리만은 못하지만 두 늙은이가 먹고 살만하니 아무 걱정말고 내 소원을 들어다오"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반대할 줄로만 알았던 아들은 입을 다물고 시집간 딸이 극구 반대를 했다. 젊어 고생으로 이뤄놓은 재산과 널리 알려진 열녀‧절부(烈女‧節婦)의 이름이 아깝지도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 노모는 고개를 설래설래 저으며 "나는 그런 허수한 이름이나 재산이 좋아 젊음을 헛되게 산 일은 없다. 어머니로서의 책임이 나를 붙잡았던 것이다. 이제 내 할일 다 끝냈고 쓸만한 노경(老境)에 말동무를 찾자는데 뭐가 어째서 안되느냐?"

결국 두 남매의 주선(周旋)(?)으로 두 노인은 맺어져서 새로 마련된 대밭(竹田)밑 새 집에서 잔치가 벌어지고 많은 마을 사람들의 축복속에 양가(兩家)의 자식들이 의형제(義兄弟)의 연을 맺고 웅성대고 있는데, 집 뒤 숲속에서 그해 들어 처음 우는 꾀꼬리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두집 아들, 딸들이 손을 맞잡고 사랑의 노래 '가고노도리(籠中鳥:새장 속의 새)'를 합창으로 부르는 라스트신(마지막 장면)은 퍽 시사적(示唆的)이고 감동적이었다.

이 이야기를 우리네 생활감정(生活感情)과는 안 맞는 '주책없는 얘기'라고 얼굴을 찡그릴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 여인의 애틋하면서도 자아실현적(自我實現的)인 충실하고 정직한 생활태도에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끼고 아낌없는 찬사(讚辭)와 갈채를 보내고 싶다.

비록 두 사람의 만년(晩年)에 꽃 피운 사랑의 실체(實體)가 순채꽃(蓴菜:연못속에 피는 暗紫色의 작은 꽃)의 줄기처럼 가늘고 연약한 것일지라도 그 되찾은 '새로운 청춘'에서 현실과 환상(幻想)이 알맞게 조화된 아름답고 소중한 삶을 경험하게 될 것이니….

가을날 집 마당에 놓인 널평상(平床)에 몸을 바짝 붙이고 앉아 손을 잡고 먼 하늘에 다시 차오르는 달을 바라보는 기쁨을 누가 말릴 수가 있겠는가….

인간 애정(愛情)의 강인(强靭)하고 순수(純粹)한 실상을 보는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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