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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하기 2025.06.23.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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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마당/寸鐵活仁]公職者는 去就가 分明해야…

-4·19 그날을 回想한다


政治人을 포함한 모든 公職者는 그 地位의 高下를 막론하고 국민 중 比較優位에 있는 선발된 존재로서, 矜持와 自覺을 갖고 나보다도 남을 위하는 奉仕정신이 앞서야 하고 進退가 깨끗해야 한다. 지기가 있어서 국가나 社會에 害가 되고 存在理由가 없다고 생각되면 지체없이 자리를 내주고 물러나야 하는데, 그럴 줄을 모르고 자리에 연연하다가 비참한 終末을 보는 사람이 더러 있었는데 그 代表的인 人物이 초대 대통령 李承晩이다.

그는 永久執權을 위해 한때 국회의 기능까지 完全封鎖하고 수백명의 아까운 젊은 生命을 없앴다. 그러나 軍隊까지 등을 돌리자 손을 들고 이 땅을 떠나 이국땅에서 客死를 했다. 여기서 4·19의 과정을 대략 살펴보기로 하자.

3.15 不正選擧와 馬山事件이 起爆劑가 돼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젊은 학생들이 "李政權 打倒"를 외치고 일어나고, 서울에서는 서울大 文理大 앞 막 피어나는 '라일락'이 수줍은 듯 웃음을 짓는 거운데 校庭을 메운 학생들이 물밀듯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얼마후 서울 市內 各 大學生들과 淑明女大生들도 이에 合流했다.

이래서 正午에 이르자 中央廳앞 광화문 일대는 10만여명의 人波가 웅성대고 '경무대(지금의 靑瓦臺)로 가자'는 구호를 외치며 바리케이트를 부수고 消防車를 뺏어 탄 데모群衆들이 효자동 전차종점에 이르자 미리 布陣하고 있던 경찰의 發砲로 强風에 지는 꽃잎처럼 사람들이 거리에 나딩굴었다.

그래도 자꾸만 불어나는 群衆의 피 묻은 太極旗의 물결의 행진은 멈추지를 않고 午後 5시경부터 市街戰을 방불케 하는 본격적인 掃蕩이 시작되면서 都心에서 밀려난 一部 완강한 데모隊는 경찰車에 뛰어올라 경찰에서 奪取한 武器로 경찰과 치열한 銃擊戰을 벌였다.

戒嚴令은 이미 그날 오후 1시로 소급발령돼 밤 8시 경기도 楊平에 있던 陸軍 第15사단 兵力이 수십대의 탱크를 앞세우고 중량교 근방에 集結했다.

그러나 師團長 趙在美 准將은 서울市內 여기저기 불타고 있는 경찰관 서울 파출소를 바라보며 '진압이야 쉽지만 저 巨大한 歷史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는 일이다'고 하는 어진 想念에 잠겨 있었다.

밤 10시 戒嚴軍은 市內에  投入되고 20일 새벽 창동까지 물러가 銃擊戰을 벌이던 데모軍衆들이 계엄군에 쫓겨 高大 울안으로 몰리자, 戒嚴司令官 趙 장군은 허리에서 권총을 풀어 곁에 있는 부하에게 맡기고, 조용히 校庭으로 걸어들어가서 피묻은 태극기에 덮힌 屍體 앞에서 철모를 벗고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歷史 轉換을 알리는 一大 閃光이었다' 化石처럼 말없이 서 있는 軍人들이 순식간에 '우리 國軍萬歲'를 외치는 데모群衆들의 歡聲에 휩싸이고 얼마후 李承晩 老爺(?)의 떨리는 목소리의 下野聲明이 電波를 타고 온 世界에 퍼지고 탑골 公園에 서 있던 追從者들의 아첨의 作俑인 그의 銅像은 목에 밧줄이 묶여져서 ×묻은 나무토막처럼 어린이들의 손에 끌려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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