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면서 보험에 든다. 보험에 가입하는 이유는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이 닥쳤을 때 도움을 받기 위해서다. 보험의 본래 기능은 저축이 아니라 보장에 있다. 저축성으로 운용할 금융상품은 보험 외에도 얼마든지 존재하지만, 위험을 대신 떠안아 주는 보장성 상품은 보험이 사실상 유일하다.
보장성 보험이 제공하는 도움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물질적 도움이다. 중병에 걸렸을 때 감당하기 어려운 치료비를 지원받는 일은 분명 중요하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큰 가치는 심리적 안정감에 있다.
한국에는 윤달에 수의를 미리 준비하면 오래 산다는 풍습이 있다. 수의는 죽음을 상징하는 물건이지만, 이를 미리 준비함으로써 오히려 죽음이 멀어진다는 믿음이 생겼다. 보험도 마찬가지다. 보험금을 받을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가입 사실 자체가 마음을 놓이게 한다. 이 심리적 안정이 보험의 본질적 기능 중 하나다.
그런데 인생에는 보험상품으로는 결코 대비할 수 없는 위험들이 존재한다.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갈등, 순간의 감정에서 시작되는 사고, 그리고 아주 사소한 말 한마디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지는 사건들이다. 이런 위험 앞에서 내가 오랫동안 스스로에게 들어온 보험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선하게 산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착하게 사는 것이다. 그런데 착하게 사는 일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면, 오히려 실천하기 어려운 덕목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러나 선함은 대단한 희생을 치러야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아주 사소한 것부터 실천해 왔다.
운전을 하다 보면 내 차 앞으로 끼어들고 싶어 방향지시등을 켜는 차량을 자주 만난다. 특별히 급한 일이 없는 한, 나는 거의 항상 길을 내준다. 심지어 망설이는 운전자가 보이면 창문을 내려 손짓으로 끼어들라고 알려주기도 한다. 그로 인해 뒤차 운전자가 불편함을 느끼고 나를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정도의 비난은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사람을 스쳐 지나간다. 대부분은 다시 볼 일도 없는 사람들 일수도 있다. 그들과 잠시 스쳐 지나가는 순간에도, 가능하면 나쁜 감정이 남지 않도록 행동하는 것이 결국 나 자신을 편하게 만든다.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겠지만, 굳이 불필요한 적을 만들 이유도 없다.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일은 결국 심리적 안정으로 되돌아온다. 내가 베푼 선이 내 생애에서 직접적인 보답으로 돌아오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나의 자녀에게, 더 멀리는 손자·손녀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글로 옮기다 보니 내 마음을 지나치게 드러내는 것 같아 조심스러운 마음도 든다. 과연 이 생각에 얼마나 많은 분들이 공감해 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선하게 사는 것을 명확히 정의하기는 어렵다. 어떤 이는 이를 바보처럼 사는 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보처럼 살면 어떠한가. 스스로의 기준에 따라 선하게 살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렇게 사는 것이 마음을 덜 쓰게 하고, 결국 인생을 더 편안하게 만든다.
우리나라 영화 중에 「암수살인」이라는 작품이 있다. ‘암수(暗數)’란 드러나지 않은 숫자를 뜻하며, 암수살인은 실제로 발생했지만 수사기관에 인지되지 않아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은 살인을 말한다. 이 영화에는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등장한다.
늦은 밤, 좁은 골목길에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사람이 연쇄살인범과 어깨를 부딪힌다. 취객은 화를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붓는다. 아마 술기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순간에 “미안합니다”라는 말 한마디만 나왔더라면, 그 뒤에 이어진 비극은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그 순간에는 느끼지 못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상황을 자주 마주한다. 모르는 사람과의 사소한 말다툼, 거기에서 이어지는 순간의 분노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먼저 가세요”와 같은 말이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다면, 우리는 의외로 많은 큰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
보험은 사고가 나기 전에 우리에게 심리적 안정을 주고, 사고가 난 뒤에는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 그러나 선하게 살려고 애쓰는 태도는 그보다 한 걸음 더 앞에서 작동한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상황을 누그러뜨리고, 갈등을 줄이며, 위험을 피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인생에서 가장 큰 보험은 선하게 살려고 애쓰는 마음이라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