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용욱 제6대 국세청장은 국세행정에 관한한 '완전백지'였다.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 보안과장과 공항보안실장 등을 거쳐 육군대령으로 예편한 후 안기부 대공수사국장을 역임한 '대공전문가'였다. '대공전문가'가 거대전문가 집단인 국세청 수장이 된 것은 거의 '폭거'라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당시 정치지형은 그런 상황을 마치 즐기고 있는 듯한 형국이었다.
성용욱 국세청장은 부임하자마자 갑자기 세무관서 민원실 환경미화를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민원실이 깨끗하고 편리해야 국세행정이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취지였다.
성용욱 국세청장 취임 5일 만에 전국세무관서는 '민원실 환경개선 열풍'에 휩싸인다. 각 지방국세청 마다 민원실 환경개선 시범세무서를 만들어 놓고 관계자들이 견학토록했다. 일부세무관서는 서장 성향에 따라 민원실 환경개선작업이 '충성심 경쟁'으로 변질되는가 하면, 집기와 공사비 등 비용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엉뚱한 부작용이 발생하기도 했다.
예산이 없는 상태에서의 민원실개선작업은 불가능하다는 간부들의 진언을 성용욱 국세청장은 귀담아 듣지 않았다. 오히려 제동을 거는 일부 간부들은 무안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성용욱 국세청장은 왜 민원실 환경개선작업에 그처럼 집착했을까? 여러 견해가 있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는 '국세행정을 몰라서'이다. 집중력과 정밀성, 전문성, 통솔력 등이 종합적으로 잘 어우러져야 하는 게 국세행정인데, 그런 것들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약점이었다. 그러나 환경개선작업은 그 취지가 '대 국민용'이라는 점에서 대중의 공감을 얻기가 용이하고, 설령 실패한다 하더라도 손해날 게 없는 '안전한 게임'이라는 점이 착안의 동기가 됐다는 것이다.
특히 세무관서 민원실 개선작업은 추경석 서울청장이 이미 추진하고 있는중이어서 관계자들을 더욱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서울청은 예산 때문에 순차적으로 민원실 개선작업을 진행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 것을 성용욱 국세청장이 부임하자마자 앞 뒤 안가리고 덥썩 잡은 것인데, 결국 곳곳에서 부작용이 나타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굳이 긍정적으로 봐준다면, 비록 옳은 방법은 아니었지만 우직하게 밀어붙인 덕분에 세무관서 민원실환경개선이 더 빨라진 측면은 있다고 말한다.
성용욱 국세청장 취임 한달 여만인 1987년 6월 29일 노태우 민정장 대표는 '대통령 직선제'를 전격 선언했다. 이로 인해 정치·사회·경제 모든 분야에 민주화 기대감이 한 껏 고조됐고, 국세행정도 그 시대적 흐름에 보조를 맞추려 애쓴다.
국세청은 '6,29 선언' 한 달 여만인 7월 25일을 기해 국세행정 기본방향을 '공평' '친절'에서 '공정' '신뢰' '자율세정'으로 바꾼다. 민원실 개선을 집중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친절'이 빠지고 '자율세정'이 새로 도입 된 것은, 정치 및 사회상황의 흐름을 반영한 것이다. 민주화 물결은 '타율' 보다는 '자율'이 더 높은 가치로 인식 됐고, 국세행정도 그 시류를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함께 민원봉사실은 한층 탄력있게 운영된다. 방산세무서에 있던 '중앙민원상담실'을 수송동 서울국세청으로 옮기고, 전국 122개 세무관서에서 발생하는 세무민원 70%를 즉시 처리할 수 있도록 했다.(당시 국세청 보도자료)
그 해 11월 성용욱 국세청장은 한국세정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국세행정을 봉사행정으로 전환하겠다'고 말했다. '전천후 세정봉사'를 대내외에 천명한 것인데, 야당으로 부터 12월 대통령선거를 의식한 '선심세정'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민정당후보가 당선됐고, 국세청 민원개선업무는 한층 탄력있게 전개됐다.
1988년 2월 25일 노태우 제 13대 대통령이 취임했다.
성용욱 국세청장은 취임한 지 얼마 안됐고, 전두환 전임 대통령과 노태우 새 대통령이 한 수레바퀴라는 점에서 바뀌지 않을 것으로 예상 됐으나 취임 9개월 여만인 같은해 3월 4일 국세청장직에서 물러났다. <계속>
<서채규 주간> seo@tax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