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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하기 2025.06.22. (일)

내국세

전두환 대통령 "무혁이한테 좀 배워"

-창간 50주년 기념 기획특집-

1980년대 중반은 온 나라가 '88올림픽'에 푹 빠져 있었다. '올림픽 이슈'는 정치불안과 국민의 민주화갈망을 잠시 정체시켰다. 또 확장경제의 시동이 본격적으로 걸린 시기다. 국세행정도 산업첨단화와 새로운 유통환경, 부동산 투기, 지하경제 범람 등 급변하는 세정환경에 대비하기 위해 조직재편과 세정능률제고에 힘을 쏟는다. 조직을 대대적으로 보강하고(12회 참조), 부동산투기를 비롯한 지하경제, 특히 탈세기업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응징했다. 그 상징적인 사건이 '명성 사건' '영동개발 사건' '범양상선 사건' 등이다.

 

'범양상선 사건'의 경우 범양상선 박건석 회장이 국세청의 세무조사가 마무리 될 무렵 서울 을지로 소재 사옥 10층에서 에서 투신자살해버려 큰 파문을 일으켰다. 박 회장은 미국의회 로비스트 박동선 씨 친형이라서 더 많은 화제가 됐다.

 

부정부패 또는 비도덕기업에 대해 국세청은 매우 단호했다.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당시 국정지표와도 맞닿아 있었다. 생태적으로 취약성을 가지고 있던 '제5공화국'이 그나마 존립기반을 형성해 갈 수 있었던 것은 '경제경찰' 즉, 국세청의 역할이 컷다.    

 

국세청은 1986년 12월 5일 '세무공무원에게 금품을 제공하는 기업에 대해서는 세무조사를 벌이겠다'고 선언하고 곧바로 실천했다.

 

 

이듬해 인 1987년 2월에는 '하늘의 별따기 보다 어렵다'는 국세청에 1급 '국제조세조정관'을 신설한 뒤 5월25일 만 5년 4일간의 국세청장직을 마감하고 안기부장으로 영전했다.

 

차관급에서 부총리급, 그것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안기부장 발탁은 '인간 안무혁'의 진면목과 당시 정치지형도를 아는 사람이라면 전혀 이상할 게 없다고 말한다. 

 

그와 함께 동고동락했던 국세청 인사들은 '인간 안무혁'에 대해 '강한 애국심과 투철한 국가관, 머리회전이 빠르고 판단력이 정확한 리더'라고 말한다.

 

정치자금 조성문제와 관련 훗날 사법처리를 받긴 했지만 '세금 문외한'이면서도 국세청과 세정을 안정시킨 것은 평가받을만 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인간 안무혁'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일화.-

 

그는 국세청장 부임초, 조사국장 선정에 심혈을 기울였다. 사회정화위원장때 확보 해 둔 자신의 정보와 기타 정부기관 정보망을 총 동원, 국세청 주요간부들의 면면을 사전에 미리 파악해 놓은 상태에서 마지막 확인 차 조관행 징세심사국장을 불렀다. 그리고 '조사국장은 누가 좋겠냐'고 물었다. 이에 조관행 국장이 '추경석 감사관이 어떻겠냐'고 답했다. 그러자 안 청장은 '역시 내가 파악해 둔 점수와 틀리지 않는군' 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임명된 추경석 조사국장은 3년 6개월이라는 국세청 사상 최 장수 조사국장을 역임한 후 승승장구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안무혁 국세청장에 대한 신임은 상상을 초월했다고 전해진다. 전 대통령은 안무혁 국세청장을 수시로 불러 국가운영에 관해 많은 교감을 나눈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 대통령의 '자문'을 받을 때 마다 그는 문제점 진단과 함께 '대안'을 꼭 제시 했고, 때문에 전 대통령은 측근들에게 곧잘 '무혁이처럼 공부좀해' 또는 '무혁이한테 좀 배워'…했다고 한다. 

 

안무혁 국세청장은 부임 초 국세청 직원들에게 '긴장의 대상'이었으나 얼마 안가 '친근한 상사'가 돼 있었다. 1987년 5월 25일, 취재차 국세청(현 서울청) 맞은 편 이마빌딩 4층 민정당 국책연구소에 들렀던 본 기자는 때 마침 안기부장으로 영전해 가는 안무혁 국세청장과 국세청 간부들이 국세청 현관에서 석별 단체기념사진 촬영 모습을 목격했다. 국세청 출입 5년여 년만에 국세청 간부들이 그렇게 밝게 파안대소하는 모습은 처음봤다. 

 

1987년 5월 27일, 성용욱 감사원사무총장이 안무혁 후임으로 국세청장에 부임했다.  <계속>

 

<서채규 주간> seo@tax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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