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 넘는 박달재 고개에서
- 젊은 세금쟁이 목숨과 맞바꾸다-
세월은 쉼이 없나 보다. 아무리 흘러가지 말라고 힘을 써 봐도 소용이 없었다. 소중한 날들은 흘러 흘러 이제는 필자의 공직생활도 마감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정년이야 아직 2년이상 남아 있지만 국세청의 관례에 따라 고위직은 58세가 되면 후배들을 위해 용퇴하도록 되어 있다. 연말이 가까워지다 보니 나도 거취를 결정해야 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지만 연말 세수 마무리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조직이 흔들리지 않게 해주기 위해 필자는 주어진 일에만 매달렸다.
게다가 당시 지역내 유지들은 한결같이 조 청장님은 정말 사심 없이 일을 잘하시는 것 같다고 칭찬해 주고 있었으며, 정보기관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또 무엇보다 이런 정보들이 청와대까지 보고되었는지 어느 날 VIP 핵심 측근이라는 분이 전화를 주셨다.
정보에 의하면 조 청장께서는 정말 반듯하게 일을 잘 하신다고 들었으며, 무엇보다 몇년전부터 곪아 터졌던 대전지방국세청 감사관실 간부들간의 내부 비리문제도 부임하자마자 말끔히 정리하고 정상적인 궤도로 올려놓았다면서 앞으로 계속 발전할 수도 있으니 아무 걱정 말고 소신껏 열심히 일해 보라는 격려성 전화였다.
여기에다 당시 국세청 고위직에는 필자보다 더 연장자도 꿈쩍하지 않고 있었다.
그 때부터 필자의 마음에는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래도 늘 마음 한편으로는 국세청 관례에 따라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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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지방국세청장 시절 국정감사를 받고 있는 모습. |
그러던 어느 날, 대전지방국세청 감사관의 긴급 업무보고가 있었다. 관내 세무서 직원 2명이 근무시간 중에 세무사사무실에서 화투놀이(고스톱)을 하다가 본청 감찰요원들에게 적발되어 옷을 벗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인적사항을 보니 앞날이 창창한 젊은 세금쟁이들이었다.
비록 그들의 행동은 잘못된 일이었지만 그래도 앞날을 생각해서라도 살려주고 싶은데 징계규정에 따르면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며칠간 고민을 하다가 “이들의 목숨과 내 목숨을 서로 맞바꾸면 어떨까?”
그래서 당시 국세청 감사관(국장)에게 전화를 했다.
“홍 국장! 잘 계시지? 다름 아니라 우리 청 관내 세무서 직원 2명에 대한 파면과 관련해서 드리는 말인데 그 친구들 목숨과 내 목숨을 맞바꾸면 어떻겠소? 어차피 나야 떠나야 할 사람이니 그들 대신 내 목숨을 가져 가시게나. 감사관 재량으로 어렵다면 이용섭 국세청장께 말씀드려 보시게.”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청장님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필자의 전화를 받은 감사관은 꽤나 충격을 받은 듯 했다. 그러면서 문제 직원 징계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지방청 감사관과 총무과장(지금의 운영지원과장)에게도 그렇게 진행을 해보라고 지시했다. 그랬더니 그들 또한 꽤나 놀라는 표정이었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당시 국세청에는 필자보다 더 연장자가 있었지만 그들과 상의 없이 내 뜻대로 명퇴 신청을 하는 것도 송구한 마음이 들었지만 죽여야 할 젊은 목숨과 맞바꾸기로 했다고 핑계를 대면 오히려 좋은 명분이 될 것 같아 마음이 한결 놓였다.
또 어차피 떠나야 한다면 미련 없이 떠나는 것이 도리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동안 국세청 조직에 대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또 무엇보다 40년 가까이를 대과 없이 이렇게 마무리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렇게 신변정리를 하고 보니 마음은 한결 홀가분했지만 한편으로는 앞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연말 세수 확보 점검’이라는 명분으로 관내 몇개 세무서를 순시하는 일정을 잡았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지방국세청과 가장 멀리 떨어진 제천세무서로 정했다. 그날 세무서 순시를 마치고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인근에 있는 ‘울고 넘는 박달재 고개’를 찾았다. 함께 한 일행들과 함께 그 곳에서 빈대떡과 도토리묵을 안주삼아 막걸리 한잔씩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이번 연말에 명예퇴임하기로 결심하였다네. 그런데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젊은 세금쟁이 두 사람의 목숨과 내 목숨을 바꾸기로 했다네. 나는 이제 때가 다 되어 국세청을 떠나겠지만 그들은 다시 살아나 국세청 조직에 힘이 되었으면 하네. 자! 그런 기분에 한잔 하세나!”
“조 청장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 귀한 목숨의 대가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필자는 그날 울고 넘는 박달재 고개에서 정말 멋있는 저녁을 그들과 함께 했다.
“내 목숨과 맞바꾼 젊은 후배 세금쟁이들아! 지금 잘들 지내냐?”
<계속>-매주 水·金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