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칼(?)을 뽑아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난 국세청에서도 마음 편할 리 없었다. 이유야 어찌됐든 특별 세무조사 집행자(가해자)가 아닌가? 무엇보다 내노라 하는 5~6개 언론사와 사주들을 검찰에 고발까지 해 버렸으니….
그 때 필자는 공보관 직책을 맡게 된 것을 후회했다. 지난 6개월동안 휴일없이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해서 밤늦게 돼서야 집으로 돌아오다 보니 그야말로 탈진한 상태였다. 마음에 평안도 없었다. 마치 첩첩산중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거기에다 앞으로 닥쳐올 시련들을 겪어낼 자신도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개인적인 신앙생활만은 게으르지 않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과거처럼 자신감을 회복해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일요일이면 사무실로 출근하기 전에 집 근처에 있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면서
“주님! 제가 너무 피곤합니다. 저에게 평안한 마음을 주십시오. 제가 지금껏 운좋게 살아온 것같이 앞으로도 그런 기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그런데 지금 제가 맨정신이 아닙니다. 날마다 언론사와 전쟁 아닌 전쟁을 하고 있으니 정말 괴롭습니다. 여기에다 사생활도 없습니다. 그러니 하루 빨리 이 자리를 잘 마무리하고 다른 자리로 가서 이제 얼마 안 남은 세금쟁이 현직 생활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어려움이 닥치면 닥칠수록 신앙심은 더 깊어진다고 누군가가 말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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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근 천안함재단 이사장은 2011월3월29일 KBS 1TV 아침마당에 출연해 ‘감동 20년 희망 20년’을 주제로 강의했다. 조 이사장은 지나온 삶을 통해 얻은 지식과 지혜를 바탕으로 어떤 것이 진정한 행복인지 진솔한 이야기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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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런 어려운 가운데서도 언론사 관계자들의 길흉행사는 꼭 챙겨야 했다. 어떤 때는 직속상관인 국세청장을 모시고 다녀와야 할 때도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런 어려울 때일수록 그들의 개인적인 대소사에는 충실히 하는 것이 옳은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 중에도 슬픈 일을 당한 경우만이라도 꼭 참석해 주어야 하는데 한두군데가 아니었다.
언론사마다 출입기자들을 비롯해서 데스크 간부, 심지어는 사주나 임원들까지도 챙겨야 했으니….
이런 경우도 있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어느 여름 날 어떤 언론사 사주의 사모님 되시는 분이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우연히도 필자의 아내도 그 슬픈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분은 아내 자신이 개인적으로 매우 존경하는 고등학교 선배님이란다. 그러면서 비가 너무 와서 자기가 직접 문상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나보고 자기 대신 갔다 오라고 했다. 그래서 바쁜 틈을 내어 병원 영안실에 가서 상주분들에게 그런 사연을 이야기했더니 그 상주분들이 퍽 고마워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십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후 남편되시는 그 언론사 사주께서도 돌아가셨는데 그때 나는 세무사회장 자격으로 또다시 문상을 가서 그 상주분들을 위로했다.
비록 필자가 현직 공보관으로 있을 때 그 언론사에 과중한 심적 부담을 드렸지만….
필자가 이렇게 한 이유는 그 동안 살아가면서 나름대로 체득한 지혜라고나 할까? 결혼식과 같은 기쁜 날에는 다소 빠져도 덜 서운한데 슬픈 소식을 받은 경우에는 그들을 위로하고 함께 울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젊은 출입기자들이 애지중지하게 키우던 귀여운 애가 갑작스럽게 죽었다거나, 갑작스런 교통사고를 당해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거나 아니면 그렇게 사랑하던 아내가 중병으로 죽었다는 슬픈 소식들을 접할 때마다 왠지 모르게 내가 직접 당한 것 같은 아픈 마음이 들었다.
또 어떤 때는 출입기자 본인이 갑작스럽게 죽었다는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 들을 때도 있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 맑은 목소리로 서로의 안부까지 묻고 한 절친한 사이였는데….
필자는 당시 1년8개월간의 그 어려웠던 공보관 시절에 개인적으로 많은 언론인들을 만나다 보니 다른 세금쟁이 동료들보다는 그런 슬픈 소식들을 많이 접한 편이었다.
그 때마다 나는 유달리 자주 보는 한 성경 귀절이 기억났다.
“우는 자와 함께 울라.”
<계속>-매주 水·金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