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식하고 겁없는 공보관
그때부터 몇달간에 걸쳐 23개 중앙 언론사에 대한 특별 세무조사를 서울지방국세청 조사국에서 살벌하게(?) 실시하였다.
명분은 세무조사였는데 실제로 나타난 현상들은 정권 대(対) 신문, 신문 대(対) 신문, 신문 대(対) 방송이라는 이상한(?) 전쟁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필자가 매일 만나는 출입기자들끼리도 과거와는 달리 매우 서먹서먹한 사이로 변했다.
필자는 그런 경험을 처음 해 보았다. 참고로 YS정권 때인 지난 94년 경에도 중앙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가 있었지만 그 때는 지금같이 일시에 동시다발적으로 세무조사를 한 것이 아니라 몇 단계로 나누어 순차적으로 조사했더니 큰 갈등 없이 마무리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때와는 달랐다. 정말 살벌했다. 그런 가운데서 필자는 ‘공보관’이라는 직책으로 출입기자들에게 양식(?)이 될 기사꺼리도 꾸준히 제공해 주어야 하는데 전쟁시국(?)이다 보니 기사꺼리가 있을 수 없었다.
분위기가 이러다 보니 출입 기자들은 자연히 국세청 비판기사를 자주 써서 데스크로 보냈다. 그 때마다 나는 출입기자들에게 제발 그런 기사는 쓰지 말아 달라고 사정사정했다. 그러나 마이동풍이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이런 악순환이 거듭되었다. 그렇다고 그것을 막을 뾰족한 방안도 없었다. 다만 필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들에게 다가가 이들의 고충을 진심으로 이해해 주는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이들의 자존감만은 제대로 세워 주려고 노력했다.
누군가가 그랬지. “공보관은 ‘반 기자, 반 공무원’이라고….” 그래서 그들이 기사를 쓰면 기사가 잘 됐다, 못됐다라고 일방적으로 비평하는 것보다는 잘 썼다고 격려해 주었다.
|
2015년 올해는 천안함 피격사건 5주년을 맞는 해로, 추모행사들이 전국 곳곳에서 열렸다.<사진은 조용근 이사장이 천안함 5주기 음악회에서 해군참모총장과 함께>
|
반면에 이런 분위기를 이해 못하는 국세청 수뇌부에서는 사실과 다른 기사를 썼다고 강하게 해명하라고 필자에게 지시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그들의 감정만 건드리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김 기자! 기사 쓴다고 정말 고생 많았다. 참 잘 썼다. 그런데 이 기사가 나갈 경우 국세청에서는 세금을 제대로 걷을 수가 없다네, 누가 이런 기사를 보고 고분고분 세금을 잘 내 주겠는가? 그러니 잘 고쳐주게나”라고 진심으로 이야기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의 데스크(부장급 간부)에게 “저 김 기자 기사 정말 잘 썼다”라고 김 기자를 최대한 치켜 세워 주면서도 이 기사로 인해 국세청이 당할 고통을 간곡히 이야기했다.
그런 다음에 신문을 직접 만드는 편집부 책임자에게 가서 기사의 지면 배열문제나 기사 제목에 대한 선처를 구했다. 그것도 여의치 않은 경우에는 직접 편집국장에게 찾아가서 전후사정을 이야기하고 역시 선처를 구했다.
이렇게 필자는 내 나름대로의 언론사 접촉 원칙을 세워 일해 보았더니 웬만하면 내가 의도하는 데로 수정해 주기도 하고 지면 배열 문제도 어렵지 않게 배려해 주었다.
참으로 고마웠다. 지금 생각해 봐도 내가 그때 내가 지켜온 그 기준과 방법들이 제대로 먹혀 들었다는 생각이 들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그 동안 말단 세금쟁이에서 출발하여 한 단계 한 단계 거쳐 올라가면서 나름대로 터득해 얻은 삶의 체험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쨌든 당시 국세청과 언론사간의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자주 일어나는 현상 중 하나는 언론에 실린 기사 제목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이다.
‘국세청 또 비리’ 아니면, ‘세리(稅吏)들 또 비리 저질러’ 등….
이런 골치 아픈 기사 제목들이 신문 가판(街版)에 실릴 때 마다 나는 정말 괴로웠다. 혹시나 내 가족들이 이걸 보게 되면 무어라 할까? 그럼에도 언론사들이 국세청과의 전쟁 중인 것을 감안하면 그들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내가 언론사라 하더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런 어려운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국세청 수뇌부에서는 필자에게 그런 부정적인 기사를 고치라고 강하게 지시하는 경우도 적지 않아 참으로 괴로웠다.
그래서 신문 본판(本板)이 인쇄되기 전에 관련 책임자에게 연락해서 고쳐 보려고 해 보았지만 깊은 밤중이라 아예 통화조차 되지 않거나 운 좋게 통화가 되더라도 전혀 말이 먹혀 들지 않을 때가 많았다. 오히려 핀잔만 들었다.
그래도 나는 무식하게 몇 번씩이나 “편집국장님! 제발 부탁 드립니다. ‘또’ 자(字) 하나만 빼 주십시오”울면서 부탁드렸다. 지금 고백하지만 필자는 공보관 생활 1년8개월 동안 그런 괴로운 날밤들을 자주 보내야만 했다.
사랑하는 2만여 후배 세금쟁이 여러분!
그런데 신문 가판에 그렇게 큼지막하게 실린 ‘또’ 자(字)가 본판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편집국장님!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때 ‘또’ 자(字) 하나 빼 주셔서….
<계속>-매주 水·金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