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라도의 깊은 밤-
예약은 철저히 지켜야 한다
콜로라도(Colorado)주의 남서쪽에 있는 블랙 캐넌(Black canyon)구경을 마친 것이 저녁 7시가 아직 안된 저녁 어름이었다. 그날 밤을 유하기로 한 곳은 듀랑고(Durango)라는 곳으로, 지도상으로 보기에 두 시간 좀 안되게 달리면 도착할 것 같아 길을 서둘러 떠나기로 했다.
550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달려가니 길 바로 앞 저 멀리에 후지산처럼 머리 부분에 하얀 눈을 이고 삼각형 모양으로 서 있는 산이 보이는데, 달려도 달려도 이 산은 점차 멀어지는 듯하다.
이윽고, 저녁 8시가 좀 안되어 ‘미국 속의 스위스’(Switzerland of America)라는 유레이(Quray)라는 조그마한 산 아래 마을에 도착하였다. 모텔마다, 식당마다 전광판에 알록달록 불을 넣기 시작하는 것이 보기에 참으로 이쁘고 아담한 전형적인 재마을이었다.
아직 더 달릴 수 있을 시간이었고, 듀랑고도 지도상 훨씬 가까이 보여 그대로 이 마을을 지나 달리기 시작하였는데, 결과적으로 무지가 빚은 무모한 여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도상으로 나타난 직선거리야 얼마 안 되지만, 이 마을을 지나자 길은 재(Pass)를 올라가기 시작하는데 알고 보니 이 지역은 샌환(San Juan)산맥이 지나는 곳으로, 해발 13,000피트(3,900m)가 넘는 산들이 100개도 더 되는 험준하면서도 경치는 절경인 일명 ‘백 만 불도로’(MHlion Dollar Highway)지역이었던 것이다. 재를 올라가는데, 한쪽은 수 십 미터의 깍아지른 듯한 절벽이고, 그나마 노폭은 좁아 보호책도 없는 것이 절벽을 돌 때마다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게다가 연료판은 아직 눈금이 4분의 1이나 남았는데도, 주유경고등이 들어오는 등 상황이 뭔가 심상찮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무식한 x이 용감하다고 그저 그래도 얼마 안가면 될 거라면서 내리 go했는데, 그게 글쎄 한반도에서 자란 사나이의 조그마한 통이 빚은 만용이었던 것이다.
사실, 차를 돌려 재 아래 유레이 마을에서 여장을 풀까도 했으나, 이미 듀랑고에 있는 한 통나무집을 예약해 두었기에 그곳에 도착하고자 하는 욕구가 더 강했기 때문이었다.
가도 가도 차는 자꾸만 하늘을 보고 올라가고, 그러자니 주유경고등은 꺼질 줄을 모른다. ‘야, 이거 이 산길을 가다 기름 떨어지면?’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데, 한 가정의 가장이 불안해하면 안 될 것 같아 일부러 애들 동요를 틀었다. 기특하게도 애들은 동요에 맞추어 뒷자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재잘거리는 것이 그래도 한결 마음은 놓인다. 하지만 갈수록 고도는 높아지고, 점차 따라오는 차나 교행하는 차의 불빛도 뜸해진다.
심지어 길 한복판에 뭔가 두 눈알이 불빛에 반짝거리는 것이 보여 놀라 자세히 쳐다보니, 늑대 한마리가 도로 우리를 빤히 노려본다.
그러더니 마치 ‘별 인간 같잖은 싱거운 X이 지나가네’라는 둣 유유자적 길을 건너가는데, 와! 이건 완전히 인간이 노는 동네를 가고 있는 게 아닌 듯했다.
불안과 적막, 암흑의 공포 속을 달려가는데,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도저히 겪을 수 없는 경험이지만, 난생 처음 가보는 생판오지에서 한밤중에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자기 차뿐인 경우, 정말 기분 아리삼삼하다.
차창 밖으로 길가를 내다보니 5월말인데도 허연 눈이 보인다. 해발 3,000m를 별거 아닌 냥 오르락내리락 달리고 있으니 당연한 노릇이다. 마침내 그 길의 최고점인 해발 11,018피트의 Red산재를 통과하였다. 세상에 ! 저녁 어름에 어줍잖게 출발하여 민족의 영봉 백두산보다 높은 곳을 넘어간 것이었다.
길이 내리막이 되니 뭔가 반은 지난 듯하여 한결 마음은 놓인다. 아니나 다를까 이 재를 넘자 곧 실버턴(Silverton) 이라는 인가 표지판이 보이 길래, 와 이제는 살았다 하면서 주유소를 찾아보았지만 이미 콜로라도 첩첩산중의 밤은 깊을 대로 깊어 우리 같은 여행객을 맞이하는 주유소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릴없이 불안과 초조함 가운데 주유경고등을 애타게 주시하면서 듀랑고에 도착하니 밤 10시가 넘었다. 주유소가 보이자마자 차를 대고 기름을 넣은 후, 빵 등으로 애들 저녁요기를 시킨 다음 다시 예약된 곳까지 차를 달렸다.
도착 예정시간인 저녁 8시를 훨씬 넘긴 밤 10시 반이 넘어서야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주유경고등이야 사라졌지만, 이미 도착예정시간을 지났기에 혹시 다른 사람한테 집을 돌려주었다면 어떡하나 하는 새로운 걱정이 우리를 내리 눌렀다.
불안한 가운데 목적지에 도착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관리인은 퇴근하고 없고, 아무도 우리를 반기지 않는 괴괴하니 차가운 어둠 뿐 이었다. 머리털나고 처음 와보는 콜로라도주 듀랑고의 하룻밤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관리실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니, 조그마하니 불을 밝힌 곳이 보인다. 가만히 보니 나처럼 밤늦게 도착하는 사람들을 위한 시설 같았다. 여길 뒤적거리자 눈에 익은 내 이름이 적힌 봉투가 보인다!
서둘러 뜯어보니 내가 묵을 오두막집 호실, 위치, 세면시설등에 대한 안내서와 함께 열쇠가 들어 있다. Oh, Thanks to God ! 생판 얼굴 한번 안 본 관리인의 세심한(?) 배려에 길바닥에서 노숙하지는 않게 된 셈이었다.
미국은 예약이 제도화된 사회이다. 일단 예약을 한 이상, 예약당사자 중 한 쪽에 의해 취소가 되지 않는 한, 그 예약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유효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니 예약을 못 지킬 것 같으면 반드시 연락을 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예약문화라는 게 우리나라라고 미국과 특별하게 다른 것은 아니다. 다만, 미국인의 경우 그 문화에 보다 철저하다는 것이고, 우리는 덜 철저하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그저 예약이나 해 두었다가 내가 필요 없으면 단순히 묵살함으로써 땡! 인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한 말이나 약속은 자기가 끝까지 책임진다는 그런 의식이 우리보다 확고하다는 것이다.
자기가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거, 그거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기실 선진사회의 초석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