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판장사 아버지와 막걸리 한잔
3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할 즈음에 필자에게는 마음에 걸리는 점이 하나 있었다. 수세식 화장실이 딸린 10여평 규모의 방 2칸짜리 영세아파트 지하실에서는 더이상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낮에도 햇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컴컴한 곳에서 아버지와 다 큰 두 여동생과 함께 살 수 없었다.
또 그즈음에 아버지께서는 남가좌동에 있는 모래내시장에서 1평짜리 좌판을 하나 구입해서 양말을 비롯한 간단한 생활용품을 팔고 있었다.
좌판에 있는 물건을 몽땅 팔아도 십만원도 채 되지 않았지만 아내를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해서인지 몰라도 매일 그렇게 소일거리 삼아 장사를 하고 계셨다.
그래서 가족들과 상의 끝에 아버지의 소일거리가 있는 모래내 시장 부근에 있는 단독주택에 전세로 살기로 했다.
이때 필자는 ‘가난’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다. 흔히들 말하기를 세무공무원이라면 잘 먹고 잘 산다는데….
그래서 어느 날 퇴근후 저녁식사 자리에서 아버지에게 막걸리 한잔을 올리면서 그동안 마음에 담아둔 이야기를 했다.
“이 세상에는 아버지와 저밖에 없네요. 어쨌든 건강하시고 무엇이든지 하고 싶으신 것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그리고 우리가 가난하고 힘 없다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절대 비굴하게 살지 마세요. 제가 비록 말단 세무공무원이지만 앞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반드시 성공할 겁니다. 그때까지 살아 계셔야 합니다. 또 두 여동생도 그동안 고생 많이 했으니 이제부터 제가 뒷바라지 잘 하겠습니다.”
그때 아버지께서 눈물을 흘리셨다. 모처럼 보는 아버지의 참모습이었다.
다행히 출가한 누나가 단칸방 신세지만 가까운 신촌 로터리에서 노점상을 하고 있는 남편과 함께 살고 있었고, 가끔은 어린 외손주들의 재롱도 볼 수 있어 그런 대로 행복하다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가난이다. 그러니 너는 악착같이 일해서 부자돼 남에게 꾸는 자가 되지 말고 꿔주는 사람이 되거라”라고 힘줘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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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근 천안함재단 이사장은 2007년 한국세무사회장으로 취임할 당시 불우한 이웃을 도울 수 있도록 축하화환을 대신해 ‘사랑의 쌀’ 성금으로 기탁해 줄 것을 요청, 전액을 사회복지단체 3곳에 나누어 전달했다.<당시 사랑의 쌀 전달식이 끝난 후 기념촬영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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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필자는 그 뜻을 마음에 굳게 새겨뒀다. 비록 보잘것없는 말단 세금쟁이지만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생각하자. 또 필자가 믿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날마다 하루에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필자보다 더 어렵고 가난한 사람을 보여달라고….
다행히 빠른 시일내에 아파트가 팔렸고 그 돈으로 남가좌동으로 이사를 하게 됐다. 우리 가족은 날아갈 듯이 기뻤다.
무엇보다 두 여동생들의 기분이 달라졌다. 오빠가 제대를 하고 한 집에서 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마음이 든든한지 모르겠다고 했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말상대가 되어주고 있어서 좋다고 했다.
또 아버지께서는 낮에는 인근 모래내시장에서 좌판장사를 하시면서 소일거리가 있어 좋다고 하셨다. 하지만 가끔은 술 한잔 하시고 우시기도 하셨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그토록 구박했던 조강지처가 생각나셨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여동생들과 상의 끝에 아버지의 기분 전환을 위해 다시 집을 옮기기로 했다. 이 참에 공기 좋은 수유리쪽으로 가기로 했다. 수소문 끝에 10여평 정도의 하천 부지를 깔고 있는 자그마한 단독주택이 있었는데 집값이 백만원도 채 되지 않아 남가좌동 전세돈과 약간의 은행 대출을 받으면 구입이 가능할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는 필자가 다니는 용산세무서까지 출퇴근이 걱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말이면 도봉산으로 등산도 할 수 있고, 무엇보다 아버지께서 좋아하셔서 서둘러 이사를 하게 됐다. 물론 모래내 시장에서 하셨던 아버지의 좌판 장사도 그만두시게 했다.
제대후 불과 몇개월만에 침울했던 우리 집도 밝은 햇빛이 비추고 있었다. 그렇게 가정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다 보니 필자도 세무서에서 하는 일도 더 잘 풀리는 것 같았고 오로지 일에만 몰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납세자에게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 가고 있었다.
<계속>-매주 水·金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