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송이 세금쟁이 다시 태어나다
73년3월15일 필자는 서울 수색에 있는 예비 사단을 거쳐 35개월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바로 용산세무서로 복직하게 됐다.
실로 만감이 교차했다. 3년간의 혹독한 시련을 견디고 무사히 제대하게 됐으니….
다른 병사들보다 3~4년 늦은 나이에다 어려운 가정형편, 그 와중에 어머니의 죽음을 맞는 등 개인적으로 정말 참고 견디기 어려운 환경이었음에도 무사히 기나긴 고통의 터널을 빠져 나왔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나 자신이 기특하기도 했다.
또다른 한편으로는 필자가 믿는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간섭해 주셨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이 가능했다고 생각하니 더욱 감사하고픈 마음이었다.
또 그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유일상 선배님과 같은 고마운 분들께서 주선해 주셔서 틈틈히 세금 아르바이트 생활을 통해 자칫 잊을 뻔 했던 3년간의 세무업무 공백도 빨리 채울 수가 있었으니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복귀후 필자가 배치받은 곳은 조사과 조사계였는데 군대가기 전부터 갈고 닦았던 업무라서 생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필자는 공직자로서는 비록 8급이지만 입사 7년차로서 과거의 애송이 세금쟁이가 아닌 어엿한 청년 세금쟁이로 거듭난 것이다.
또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그 어떤 어려운 시련이 닥쳐 와도 홀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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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근 천안함재단 이사장이 명예본부장으로 있는 다일공동체 사랑의 밥퍼나눔운동이 개신교의 사회적 실천모범사례로 선정되어 중학교용 도덕교과서에 소개되었다.<조용근 이사장(맨 오른쪽)과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왼쪽, 전 전경련 회장)이 봉사에 나서고 있다. 중앙교육진흥연구소 발행 중학교 도덕교과서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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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 보니 필자는 그때 각오를 단단히 했던 것 같다. 그동안 필자를 늘 괴롭혀 왔던 병역문제와 같은 큰 장애요인도 말끔히 해결됐으니 이제부터는 오로지 일로서 승부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비록 지금은 빽이나 재력, 학벌도 없는 말단 신세지만 언젠가는 나도 남들이 바라보는 자리로 올라갈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인생은 내가 스스로 개척해야 하며 그 길은 오로지 나만의 독특한 업무 추진력이라 생각했다.
그 때부터 필자는 윗분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그 일은 안됩니다” “문제가 있습니다” “못합니다”라는 부정적인 말을 거의 쓰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기관장이나 상급자 분들께서 시키는 일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고 또 실제로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도 보여드리려고 무단히 애를 썼다.
참고로 당시에는 직장마다 예비군 조직이 강화돼 있었고 국방부 등 군부대로부터 직장예비군 검열도 자주 있었다. 그때마다 필자는 따끈따끈한(?) 예비군 분대장으로의 역할을 잘해줘 세무서장이나 몇년후 국세청으로 발령받은 후에는 국세청 고위 간부님들로부터 칭찬을 많이 받은 것으로 기억된다.
필자가 칭찬받고 표창받은 이유는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도 있지만 조직을 위해 남들보다 더 열심히 훈련에 임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필자는 가끔 내가 거쳐온 전(全) 인생길을 100미터 달리기 경주에 비유해 보곤 하는데 3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직하는 시점을 달리기의 출발선으로 생각했다. 그 이전까지의 6년 동안은 경주자로서 갖춰야 할 지식과 덕목 그리고 특히 군대 3년은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장시키는 세팅(setting) 단계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100미터를 본격적으로 달리면서 남들보다 앞서 나가기 위해서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뜀박질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절대로 옆에 달리는 다른 경기자를 비교하지 말자. 남이야 어떻게 달리든 내가 꿈꾸고 있는 그 골인지점을 향해 나는 그대로의 생각과 희망을 가지고 뛰어야 한다고 굳게 다짐했다.
이런 마음의 각오를 굳게 다지면서 매일 아침 용산구 후암동에 있는 용산세무서로 향하는 필자의 마음에는 왠지 모를 힘이 솟구쳐 있었다.
또한 그동안 말 못할 고생과 역경을 견뎌낸 외로운 아버지, 그리고 두 여동생에게도 희망을 보여주리라!
<계속>-매주 水·金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