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세무서장 시절
90년3월16일 영등포세무서장으로 부임하였다.
나는 이번이 어쩌면 세무서장으로서의 보직은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하는 예감이 들었다. 이번 수시 인사에 내가 낀 것은 서 청장의 특별한 배려였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영등포세무서로 부임한지 한참 후에 서부세무서 관내 유일한 상장회사인 OO물산 S회장과 오찬을 나누었는데 그는 서 청장과 주말이면 자주 만나서 기업 현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곤 하는데 그 때마다 관내 서장인 나에 관해서 좋은 이야기를 하였노라고 했다. 좋은 사람이라도 누가 나쁘게 이야기하면 좋지 않게 보이고 좋게 이야기하면 더욱 신뢰가 가기 마련인데 그 당시 내 주변에 S회장과 같은 분이 있었다는 것은 내겐 참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황야의 무법자처럼 거친 동네 영등포
영등포세무서는 서부세무서와는 달리 세원이나 납세환경이 아주 달랐다. 서부세무서는 서울 서북쪽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고즈넉한 도시내 전원주택가를 주로 관할하고 있었지만 영등포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2대 맥주회사인 OB와 CB(크라운)가 있고, 가는 곳마다 철강유통업체가 밀집되어 있고, 중기(건설기계)회사도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
세무서 위치는 영등포역 철도와 인천, 부천으로 나가는 큰 국도변 중간에 끼어 있어 소란하기 이를 데 없고 사방에 쇳가루 투성이었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거칠고 삭막한 분위기였다.
나는 먼저 비좁은 세무서 마당부터 넓히기로 하고 구로세무서와 함께 쓰는 마당의 지저분한 화단을 제거하고 주차공간을 2배 정도 늘리고 울퉁불퉁한 마당을 아스콘으로 말끔히 단장하였다. 직원 숙직실도 3평 정도로 너무 비좁아 6평 정도로 넓혔다. 각 과 사무실내 블라인드를 교체하고 게시물을 정비하고 다시 정리정돈하도록 하여 가급적 근무환경부터 밝은 분위기를 만들려고 애썼다.
90년에도 88서울 올림픽의 여파로 국내 경기는 초호황세를 이어갔다. 부동산 투기를 규제하기 위해 토지공개념을 도입한 토지초과이득세법을 처음 시행하였고, 사치성 향락소비 조장 업소에 대한 세정간섭을 지속하였으며 영등포시장 주변에 아지트를 형성한 무자료 주류 도매상 단속, 영등포유통상가 임대 점포 특별관리 등의 업무를 쉴 새 없이 추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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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초과이득세제는 부동산투기를 억제하고 토지공개념을 도입한다는 취지로 마련됐지만 미실현소득에 세금을 매기는 제도라는 점에서 토지 소유자들의 거센 반발에 봉착했다. 당시 국세청은 토초세 저항을 해소하기 위해 막대한 행정력을 쏟아부었다. 전국 세무관서는 토초세제를 이해시키기 위해 대 납세자 간담회를 자주 열었다. ’90년 가을 강동세무서가 개최한 ‘토초세 해설 간담회’ 모습. <세정신문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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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으로 바위치기…물가단속 업무
88년 이후 연이은 호황기에 튀는 물가를 잡기 위해 정부는 전방위적인 노력을 기울였는데, 우선은 세무 행정력으로 서민생활 물가를 올리는 업소들을 골라서 반강제적으로 가격 인하를 유도했다. 음식점, 목욕탕, 미장원, 극장, 정육점, 양곡소매상 등 수많은 서민상대 업종의 사업소에 대하여 불시 입회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 오르는 물가를 잡는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다름이 없었다.
어느 날 영등포구청에서 물가를 과도하게 올린 업소명단을 통보하고 세무조사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내 왔다. 내용을 확인해 보니 업소(곰탕집) 규모가 너무 적고 인상금액 자체가 그다지 크지 않아서 나는 구청에서 먼저 식품위생법상의 가능한 행정지도 내지 규제부터 하라고 하였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얼마후 본청 김거인(金居仁) 직세국장(후에 서울지방청장 역임)으로부터 장 서장은 정부 물가 안정시책에 협조하지 않는다고 경제기획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고 했다. 나는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세무조사라는 국가의 재정권력 행사를 타 기관이 요청한다고 다들어 줄 수 없는 사정을 말하고 본청장께도 잘 말씀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Tough Guy’체납자들
영등포에는 유난히 고질적인 체납세금이 많았다.
주로 철강 도·소매업자들이 내야 할 세금을 차일피일 미루거나 내더라도 마치 사채일수 찍는 것처럼 찔끔찔끔 나눠서 내는 것이 버릇이 되어 있었다. 세무서 담당 직원이 좀 심하게 하면 날카로운 쇠붙이를 들어 보이거나 휘두르며 공무를 방해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한때는 세무서 직원들이 체납업소에 강제로 감금당한 일이 있었는데 마침 그때 경찰 백차가 경광등을 켜고 그 주변을 순찰한 덕분에 무사히 풀려난 적도 있었다.
영등포에는 중기사업자 본사가 가장 많이 등록돼 있었는데 이들 사업자들은 전국 사방에 흩어져 일을 하면서 세금은 체납하기 일쑤였다. 하는 수 없이 체납건수가 줄어든 만큼만 신규 사업자등록증을 발급하는 것으로 방침을 바꾸기도 하였다. 이같이 거친 동네였지만 그래도 세금받는 일을 포기할 순 없었다. 일년 내내 서장도 직원들도 자나깨나 체납세금받는 일에 신경을 쏟아야 했다.
<계속>-매주 月·木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