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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하기 2025.06.23. (월)

내국세

[연재]“나는 평생 세금쟁이”(10)

갑작스런 입대, 35개월간의 군대생활

애송이 세금쟁이 군대가다

 


용산세무서 개인세과로 자리를 옮긴 필자가 맡은 담당구역은 숙명여대 입구인 청파동 일대였다. 여자대학 앞이라 그런지 자그마한 양장점을 비롯한 의류점이나 아니면 액세서리 판매가게 등 대부분 영세한 사업자들이었다.

당시는 지금의 부가가치세가 아닌 ‘영업세 과세체계’라서 납세자 대부분이 장부나 세금계산서 또는 영수증과 같은 증빙자료를 갖추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업황(業況)과 시설규모 아니면 투자금(자본금)의 금리 등을 감안해 세금을 매기는 인정과세(추계과세)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여기에는 담당 세무공무원의 합리적인 업종별 업황을 파악하는 기술이 필요했다.

필자도 지난 3년여간 조금씩 쌓아왔던 세무 실무를 어느 정도 발휘할 정도로 자리를 잡아갈 즈음에 앞으로의 진로에 큰 획이 그어지는 대형 사건(?)이 생긴 것이다.

그동안 필자의 마음속에는 늘 캥기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군대문제였다. 이 문제만 해결되면 마음껏 실력을 발휘해서 남들처럼 번듯한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러던 어느 날 대구지방 병무청에서 그동안 필자의 병역문제를 돌봐주던 담당공무원이 야간열차를 타고 상경해서 필자를 직접 찾아왔다.
그 분은 나를 만나자마자 지난 3년간 입대(入隊)를 연기해 준 것이 자칫 비리혐의로 오인될 소지가 있으니 당장 입대를 해야 한다고 하면서 필자에게 소집영장을 내미는 것이었다.

그 분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두해전인 68년1월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의 무장공비 일당들이 청와대 부근까지 침투했다가 우리 군에 발각되어 모두 죽고 김신조만 생포되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 직후라, 박정희 대통령께서 병무문제와 관련한 모든 부조리를 척결하라는 엄명을 내리셨다.
그래서 그동안 이런저런 핑계로 군대에 가지 않은 해외 유학생들을 비롯한 모든 병역 기피자에 대한 대대적인 강제 입대조치가 내려져 필자의 경우도 어쩔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1973년 3월, 군복무를 마칠 즈음 부대원들과 함께<오른쪽 두번째 조용근 천안함재단 이사장>

 


그 말을 들은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동안 세상 재미에 푹 빠져 살아온 지난 3년여간의 생활이 이렇게 막을 내리다니….
무엇보다 약관 20세 어린 나이에 어렵게 사회에 나왔으니 열심히 일해서 승승장구를 해야 하는데….
이제 내가 그동안 꿈꾸어 온 모든 걸 내려놓아야 하다니….
차라리 이럴 바에는 지난 66년 6월, 공직자로 임용되자마자 휴직계를 내고 곧바로 입대해 버릴걸….
이런저런 후회도 해보았지만 지금으로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필자의 손에 쥐어진 소집영장을 보니 70년4월20일까지 대구시 북구 칠성동에 있는 공설운동장으로 집결하라는 내용이었다.
그 분과 헤어진 필자는 곧바로 소속된 개인세과장과 계장에게 말씀드리고 내가 맡고 있었던 모든 업무를 인수인계하고 바로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다.
부모님인들 나라의 부름을 어찌 막을 수 있었겠는가…. 당장 필자만을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는 두분과 여동생들의 생계문제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그 다음날 대구에 있는 집결지로 향했고 곧바로 논산훈련소로 가는 야간 기차를 탔다.
그 후 필자는 3년에서 한달 모자라는 35개월간의 군대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73년3월15일 다시 용산세무서로 복직하게 되었다.
만약 필자가 3년간 입대를 늦추지 않고 적당한 나이에 입대를 했더라면 30개월 정도만 복무하면 됐을 텐데 3년간의 입대연기로 5개월 정도 더 복무를 하게 된 셈이었다.
어쨌든 그 기나긴 3년 동안 필자는 세금쟁이가 아닌 육군 졸병으로서 엄청난 삶의 시련을 겪으면서 더욱더 단련되어 갔다.
<계속>-매주 水·金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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