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국세청에서는 전국 세무서가 업무기능별로 필요한 인력을 우리나라의 계급제공무원채용제도와는 달리 철저한 직위분류제(Job Calssification)에 따라 처음부터 해당 부서의 전문요원을 선발해 일정기간 교육후 곧장 현장에 투입했다. 교육은 주로 지방청에서 지방청 단위로 실시하고 한가지 특이한 점은 Senior직원을 Junior직원의 강사로 활용한다는 점이었다.
이상에서 미국 일선 세무서의 조직과 일하는 모습을 간략히 썼지만 80년 당시 우리나라 국세행정의 현실과 비교해 볼 때 미국의 앞서 있는 행정의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
특히 자동화된 자료처리시스템(ADPS: Automatic Data Processing System), 제3자정보 보고제도(TPIRS), 직원 1인 1대의 PC보급, 질서정연하고 차분한 사무실 업무환경 등이 인상 깊었다.
‘Very Exellent’Dissertation
나는 이 중에서 우선 미국 세무서의 납세상담과 홍보시스템을 벤치마킹하여 우리도 도입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논문 제목을 ‘Taxpayers Service and Public Information in U.S.A., Korea and Taiwan’으로 정하고 시간과 정성을 들여 완성하고 제출하였다.
논문에서 나는 미국, 한국, 자유중국의 납세상담 및 홍보에 대한 조직 및 운영 실태를 살펴보고, 우리나라의 경우 이에 대한 문제점들을 고찰한 다음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개선할지에 대하여 미국의 납세상담 및 홍보제도를 모델로 제시하였다.
J.B.Ham 소장은 나의 논문을 끝까지 다 읽고 군데군데 붉은 펜으로 comment를 하고 말미에 ‘Very Excellent’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후 우리 한국 국세청에서 이 연구소에 유학온 학생들에게 모범답안처럼 내 논문을 보여주곤 하였다고 한다.
나는 비록 단기간의 유학이었지만 국비 장학금으로 남다른 혜택을 받은 것을 생각하며 어떻게 해서라도 미국이라는 선진국세도를 배워서 우리나라에 보탬이 되도록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마칠 때까지 꾸준하게 초지일관의 자세로 임했다.
80년 11월 드디어 USC 행정대학원 조세행정 연구과정을 수료하고 귀국하여 그리운 가족과 재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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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여름 정부는 기업의 재무건전성을 제고시킨다는 명분으로 기업들의 비업무용부동산 매각을 강력히 유도했다.<사진:82년 겨울 김수학 국세청장이 전국세무관서장회의에서 기업 비업무용 부동산 매각과 관련, 국세청의 업무 추진 결의를 강조했다.<세정신문 DB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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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비업무용 부동산 정부 합동조사본부 실무팀장
나는 미국에서 귀국후 첫날 이천세무서로 출근하였다. 미국 유학기간동안 이천세무서 총무과장으로 지상 발령해 놓고 그 자리는 공석으로 비워 두었던 것이다.
아침 일찍 강남 고속버스터미날에 가서 이천행 버스에 몸을 싣고 이천으로 출근하는 내 모습이 너무 처량하게 느껴졌다.
다음 날 오전에는 양평동 본청에 가서 김수학 청장과 권영로 차장께 귀국인사를 하였다. 권 차장님은 내가 유학떠날 때 서울청장으로 계셨는데, 그 때 출국 인사드린 것을 기억하고 계셨다. 나는 차장께 이천세무서 출근소감을 말씀드리고 차기 인사때는 나의 보직에 대하여 신경써 달라고 말씀드리고 나왔다.
바로 그날 오후 5시쯤 본청 소득세과장 임복빈과장으로부터 집으로 전화가 왔다. ‘장 사무관이요? 내일 아침 9시까지 직세국장실로 오면 좋겠소. 거기서 만나 이야기합시다’라는 것이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나는 무언가 좋은 예감이 들었다. 다음날 본청에 들렀더니 나더러 내일부터 본청 소득세과에 나와서 기업 비업무용 부동산 정부 합동본부팀장을 맡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일의 내용도 모르면서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했다.
1980년 여름 신군부 권력은 광주 5·18사태를 진압하고 기업의 재무건전성을 제고시킨다는 명분으로 금융기관에서 100억원 이상 대출받은 기업체에 대하여 업무용 부동산과 비업무용 부동산을 구분해 신고하고 비업무용 부동산에 대하여는 자진매각 처분계획서를 작성하여 주거래 은행을 통해 한국은행에 최종 보고토록 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이들 기업이 자진신고기간 내에 미신고 하여 은닉한 비업무용 부동산에 대하여는 당시 내무부에 정부 합동조사본부를 설치하고 이를 조사키로 하였다. 그러나 내무부는 80년 10월 국민투표 실시를 이유로 이 방대한 일을 국세청으로 떠 넘겨 버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국세청장이 합동조사본부장, 소득세과장이 합동조사반장, 내가 합동조사실무팀장이 된 것이다. 당초에는 소득세과 양도소득세계장이 이 일을 맡아야 했으나 전국 금융기관과 내무부 산하 전국 읍·면·동 그리고 국세청이 함께 합동으로 추진해야 하는 일이어서 임시특별실무팀을 구성했던 것이다. 바로 이 실무팀 구성을 위하여 결제를 진행하던 중 그 날 권 차장께서 실무팀장은 이제 막 유학에 돌아온 나로 대체 하도록 한 것이었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려고 알 안에서 똑똑 소리를 내면 암탉이 이 소리를 듣고 동시에 밖에서 달걀 껍질을 쪼아 병아리가 나오게 한다는 줄탁동시(啐啄同時)의 호경사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
<계속> -매주 月·木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