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건 트레일-
서부개척사와 경쟁원리
I-84는 미국 중서부 유타(Utah)주의 솔트 레이크 시티(Salt Lake City)에서 태평양을 바라보는 오리건(Oregon)주의 포틀랜드(Portland)까지를 이어주는 고속도로이다.
이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달려가다 아이다호(Idaho)주를 지나 오리건주를 들어서면 얼마 안가 베이커 시티(Baker City)라는 인구 만 명도 안 되는 조그마한 도시에 이른다.
이 도시는 저 뒤로 하얀 눈을 이고 서 있는 록키산맥을 배경으로 고즈넉이 들어서 있는 참으로 차분하고 정갈한 느낌을 주는 도시이다.
무엇보다도 19세기 중반 미국인들의 서구개척사의 애환을 아직도 느껴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었다.
19세기 중반 동부의 애팔라치안 산맥 서쪽, 중부에 살던 사람들이 약속의 땅을 그리며 서쪽으로 서쪽으로 나아가 드디어 태평양 연안까지 진출하게 되었는데, 그 개척길을 오리건 트레일(Oregon trail) 이라 하여 미국인들은 대단한 역사유적으로 치고 있다.
개척민들이 겪었던 온갖 시련들을 묘사한 사진, 그림, 영화, 밀랍인형, 유품 등이 있는 기념관이 이 도시에 있어 살펴볼 기회를 가졌다
나이가 지긋한 노인네들이 젊은 손자, 손녀들을 데리고 아주 의미 깊게 감상하고 음미하는 것이 상당히 근엄하게 느껴졌었다. 뭐라 할까 우리 같으면 민족의 성지를 순례한다는 느낌이라 할는지,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데 막상 이 기념관을 둘러보고 나면 정말 미국인들의 서부개척 의지와 정신은 아무리 높이 사도 부족함이 없다는 걸 이해하게 된다.
대개 오리건 트레일은 1841년에 시작해서 19세기말까지 이어졌는데 실질적으로는 대륙횡단 열차가 완성된 1869년까지 이루어진 약 300,000명의 미국인들의 서부개척사의 한 장을 말한다.
중부 미주리(Missouri)주의 세인트루이스(StLouis)에서 주로 4월말이나 5월초에 서부로 출발한 포장마차의 행렬은 근 2,000 마일의 길을 6개월에서 1년 가까이 걸려 이동해 갔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이 2,000마일의 거리를 대부분 걸어갔다는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대충 하루에 나마갈 수 있는 거리는 15마일 정도였단다.
지금에야 모든 걸 다 알고 교통수단도 좋고 하니 “아! 뭐, 고생 좀 하고 갔겠네”하겠지만, 그 당시 그 시절에 그렇게 걸어간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천재지변에 연약한 맨몸이 그대로 노출되고 여기에 끽이면 이름 모를 들꽃과 함께 육신은 들판에 묻혀 사랑하는 부모형제와 다시 만날 기약 없는 영원한 이별을 해야 한다.
비가 심하게 오면 자동차 와이퍼(wiper)를 최고속도로 해도 앞이 안보일 정도로 퍼부어 댄다. 허허벌판에서 그런 비를 피할 곳은 포장마차뿐인데 그나마 곧 젖어버리고...... 약도 없는데 감기라도 걸리게 된다면
미국 천둥번개는 정말 무섭다. 한 번은 내가 살던 집 부근에 벼락이 떨어진 적이 있었는데 번개 무서운 줄 정말 처음으로 알았었다. 그런 낙뢰에 맞아 사망한 사람도 부지기수라는게 쉽게 이해되었다.
우박도 한번 내리면 사과만한 것이 내리는데 구슬만한 것이 내려도 농작물이 작살나는 것에 미루어 본다면 그 피해가 어느 정도일지 알 것이다.
또 강을 건넌다는 것은 거의 목숨을 건 시련이었다. 일가족이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경우도 많았다.
포장마차를 타고 평지로만 가는 것도 아니고, 산을 오르고 내려야 되는데 포장마차는 산을 내려오는 것이 더 어렵다는 걸 알았다. 잘못해서 깔려 죽거나 평생 불구가 되는 경우도 흔했다,
안전사고도 많아 아이가 포장마차에 타고 가다 졸다 떨어져바퀴에 깔리는 경우도 많았는데 대부분 즉사다. 총기 오발 사고도 흔했다.
콜레라가 한번 돌기 시작하면 살아남는 이는 드물었고, 목욕이나 빨래 등 위생 상태는 한마디로 빵점이었다. 모닥불에 구워먹는 빵은 숯이 되기 십상이고 한 그릇 받아든 죽(soup)은 먼지나 벌레를 가려내어도 먹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나마 주위에 땔감을 얻을 수 있는 곳이라면 모닥불을 피울 수도 있지만 그것도 땔감이 없는 곳을 지나가는 때도 많았던 것이다.
야영을 할 때는 대개 포장마차를 원으로 삥 둘러싸서 노숙을 하게 되는데, 인디언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것보다 데리고 가는 가축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단다.
사실 인디언들과는 대부분 관계가 좋아 물물교역도 했으며 상호간의 학살극은 예외에 속했다 한다. 그 외 추위, 굶주림, 늑대, 독사 등등 처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갖은 고생을 겪고 막상 태평양에 도착한들 자기들을 맞아줄 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바다가 더 이상 못 가게 할 때까지 나가고, 그러다 보니 거기서 정주한 것이라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꺾이지 않는 강인한 의지가 없었다면 요즘 캘리포니아, 오리건, 네바다, 아이다호, 유타주 둥은 멕시코나 캐나다의 영토로 되었을 것이다.
이 모든 과정들을 그 기념관에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는데, 만약 내가 그 이주민이었다면 나 역시 그런 혹독한 자연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길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사랑스런 아들이 포장마차에서 졸다가 떨어져 바퀴에 깔려 죽거나 어린 마음에 그저 까불고 놀다가 독사에 물려 죽거나, 아내가 병약하여 먼저 죽는 것을 보면서 무엇을 느꼈을 것인가?
신을 찾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스스로에 의해 극복되지 못하면 그대로 끝이었다. 남이 해줄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체력, 두뇌 그리고 총뿐이었다.
왜 미국인들이 냉정한 시장원리나 경쟁원리에 익숙하게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를 이들의 서부개척사에서 찾아본다면 자기도취의 비약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