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이 망한다면-
땅 짚고 친 헤엄
미국에서 은행구좌를 개설하려면 이것 역시 자기 책임 하에 스스로의 판단을 요구하는 일임을 알 수 있다.
이유는 내가 이용하는 은행이 망했을 경우에 내 돈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 때문이다.
1998년에야 우리는 은행도 망하는구나 라는 걸 알 수 있었으니, 그보다 한참 전인 1994년에 이런 소리를 들은 즉 이 무슨 소린가 싶어 이해가 잘 안되었다. 은행이 망하다니? 세상에, 은행의 공익성이 얼마나 큰 것인데 은행이 망하게 두다니 도대체 정부라는 것은 어디 쓰자고 만들었노 하는 의구심이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들게다.
뭐든 미국 가면 미국법 따를 일이라 꼬부랑 글이랑 꼬부랑 말을 이리저리 주워들어 보니, 내가 트고자 히는 구좌에 따라 최소일정액의 잔고(balance)를 유지해야 하고, 그에 따라 이자도 달라지고 신용한도(credit limit)도 달라진단다.
즉, 최소 잔고 유지 의무를 200달러짜리로 할지, 1,000달러짜리로 할지 등은 내가 선택한 잔고액에 따라 누리는 혜택이 달라지는 것이다. 무조건 같은 금리 혜택을 누리는 우리 시스템과는 다른 것이다.
자기가 선택한 예금 종류에 따른 잔고를 유지하지 못하면 부담금(charge)이 나온다. 잔고만 유지하면 될 터인 것을 그렇게 하지 못함으로써 애꿎게 은행에 공짜로 달러를 고스란히 바쳐야 되니 이용자들은 잔고를 지키게 마련이다.
따라서 은행은 이용자들로부터 확실하게 확보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금액을 파악하게 되고 그에 따라 자금운용을 안정적으로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은행 입장에서는 망하지 않기 위한 한 가지 안전판이 되는 셈이다.
은행이나 고객이나 이용관계의 기저에는 은행도 망할 수 있다는 인식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은행은 맡겨진 예탁금을 어쨌든지 최대한 수익을 올리는 곳에 투자하게 마련이다.
백악관 전화 한통 받고 어디 허름한 회사에 대부해 준다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회사 망하면 나는? 수익성이 대출여부의 기본이 될 수밖에 없다.
어느 은행에든 가보면 창구 직원 3명 정도, 그리고 대출 등 서비스 업무 맡는 2~3명 정도밖에는 직원이 안 보인다. 통장이라는 것도 없어 돈을 맡기면 창구에서 전산 처리로 끝내 버리고 아무런 증빙 쪼가리도 안주기에 은행문을 나서면 뭔가 찜찜하다.
이거 제대로 입금이나 된겨? 혹 저 x들이 오리발 내밀면 어쩐댜? 하여튼 한국에서 속기만 하고 살아온 사람이라 그런지 불신의 시각으로 미국생활하려니 불안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 사람들 내 돈 떼먹은 적 한 번도 없었고 계산 틀린적 한 번도 없었다.
반대로 우리나라 은행에 가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로 직원들이 많다. 창구 여직원은 왜 그리 많으며, 또 그 여직원 뒤의 대리라는 ~ 요즘은 과장이라고 바뀐 듯 한데 ~ 사람은 뭘 하는지......
금리도 미국에서는 저축예금이든 보통예금이든 금리 차이는 별반 없다. 한국식 경험으로 이만한 돈을 저축예금 구좌에 이만큼 넣어두면 최소한 이만한 돈의 이자는 붙겠지 했는데, 아예 기대를 않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로울 정도다. 최소 잔고 유지액에 따라 달라지지만 내 구좌는 연 3% 수준 정도였던 것 같다.
미국 사람들한테 우리 은행 이자율이 연 13.5%라 하면 모두은행에 있는 자기 돈을 빼 한국에 넣을 수 없느냐고 난리를 떨며 물어 댄다.
내가 이용한 은행이 결국 망하는 꼴은 못 보고 왔지만, 은행도 망할 수 있다는 인식은 무지하게 중요하다. 은행간 인수합병(M&A)이라는 것은 그 드러나는 현상인 셈이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정부는 은행이 망해도 눈만 멀뚱멀뚱 뜨고 망하게 놔두고, 고객이 어떻게 모은 내 돈인데, 정부는 뭘 하는 거냐고 아우성을 쳐대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한다.
철저한 자기 책임하에 자기들끼리 거래하는 것이 시장원리고 금융기관을 그런 시스템으로 운영하게끔 하는 것이 금융개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