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후, 그 직원의 부모님들은 다 고쳤다고 하면서 그의 딸을 데리고 왔다.
진단서는 가져오지 않았지만 일단 부모님의 말을 믿기로 하였다.
나는 여직원으로만 구성돼 있는 징세계에서 근무하는 것보다는 남자직원들과 함께 근무하면 좀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해 부가세과로 옮겨줬다.
부가과장에게 정상적인 사람으로 한번 만들어보라고 특별히 주문했다. 부가세과로 옮긴 이후에도 그는 아무런 차도가 없었다.
부가과 사무실에 들려보았더니 과자를 잔뜩 사서 책상위에다 올려 놓고서는 히쭉거리며 먹고 있었다.
납세자가 사무실에 들어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일을 너무 모르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옆에 있던 고참 기능직 여직원 김 여사가 일을 가르쳐 줬는데 다짜고짜로 두들겨 패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기능직이 건방지게 어따 대고 정식 직원에게 지시하느냐 하면서.
깨진 안경과 얼굴에 상처가 난 그 여직원은 분에 못 이겨 지방청 감찰에다 진정을 하게 됐고 'Y○○' 는 감찰에 가서 조사를 받게 됐다.
H지방청장님이 박서장이 고생했으니 이번에 지방청에서 깨끗하게 정리해 주겠다면서 전화를 주셨다.
감찰에 가지 않으려는 Y양을 출장명령이라며 부가과장이 겨우 데리고 가는 것까지는 성공이었는데 횡설수설 어디 조사가 되겠는가?
자기가 국세청장이 되면 현대그룹을 박살내겠다. 현대그룹 입사시험때 면접에서 떨어뜨린 원한을 보복할까 봐 징세계장을 시켜 자기를 몰아내려고 한다나.
감찰에서도 두 손을 들어버렸는데 오죽했겠는가?
나의 예상대로 결국 세무서로 인계를 하니 적의처리를 하란다.
나는 부모님들을 다시 불렀다.
자기가 국세청장이 되면 현대그룹을 박살내겠다. 현대그룹 입사시험때 면접에서 떨어뜨린 원한을 보복할까 봐 징세계장을 시켜 자기를 몰아내려고 한다나.
감찰에서도 두 손을 들어버렸는데 오죽했겠는가?
만약 파면을 하게 되면 혼인길도 막히게 될 것이므로 스스로 퇴직할 것을 종용했다.
부모님들은 2년간 휴직처리를 좀 해달라고 사정을 했다.
휴직사유를 물었더니 "미국에 유학을 가서 국제조세관계를 연구한 다음 돌아와서는 국세청장이 되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또 현대그룹을 박살을 내겠단다.
사유만 합당했다면 나는 휴직으로 처리하려고 생각했는데 그 소릴 듣고는 다시 마음을 바꾸었다.
휴직하면 본봉의 반을 주는 예산이 우선 아깝고, 유학을 다녀와 다시 복직을 시켰을 때에 국세청장 안 시켜준다고 떼를 쓸 것이 뻔하며, 누군가 또 그의 일 때문에 곤욕을 치룰 것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니 여기서 끝을 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나는 문서로 휴직원을 반려하고 기한을 못 박아 정신과의 진단서를 제출하도록 지급(至急)으로 발송을 했다.
며칠뒤에 어머님과 같이 온 Y양은 사표를 냈고 징세계장에게 내려가서는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현대 정○○ 회장과 잘 먹고 잘살어!"
"이 년아!"
그리고서는 둘이서 어깨동무를 하고 가버렸다.
모녀는 막상막하였다.
77. 다시만남
'98년10월23일 서초에 온지 딱 7개월째 되는 날이다. 오늘이.
늦은 퇴근길, 일원동 삼성의료원 맞은 편에 있는 집으로 가기 위해 양재대로를 막 들어서는데 핸드폰 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내 바로 밑 시집간 여동생의 목소리다.
"왜? 무슨 일이 있냐?"
"오빠! 나 루시아야!"
나는 여동생이 장난전화를 하는 것으로 알고 크게 나무랐다.
진짜로 '시아'가 맞았다.(연재 9장 참조)
'69년에 이유도 알지 못한 채 헤어져 그렇게도 찾아다니던 그가 거의 30년만에 나를 찾아온 것이다. 그녀와의 만남이 나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전환점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일원역 계단에서 만난 '시아'는 아름다운 옛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30년이 흘러간 지금 서로들 가정을 가지고 있는 처지인데 지금의 만남이 정상이 아님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그에게서 알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우선 나를 떠난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무얼 하고 있는가도 궁금했고, 나와 처음 만났을 때 학교는 다니지 않고 병원에 왜 있었는지 물어볼 말들이 너무 많았고 듣고 싶은 얘기도 너무 많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