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서초'근무해서 괜찮을 거라고?
서울청 소득세과장으로 근무하면서도 다른 곳에 보내줄 때까지 묵묵하게 일만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2년6개월하고도 8일을 근무하였다.
그동안 나보다 더 늦게 지방청에 들어와 재빠르게 시내서장으로 나가는 직원도 있었고 또 누구는 서장이 돼 지방에 가더니 금방 지방청에 들어와선 또 나간단다.
나는 그들이 해대는 재주를 강 건너 불구경을 하듯이 그냥 지켜보면서 어떻게 저렇게 하는지 신세타령만 하고 있었다.
그들이 작별인사를 하러 나에게 왔다. 미안하다면서.
나는 이렇게 쏴줘 버렸다.
"L형 그리고 K형, 빨리 나가는 방법 좀 가르쳐주시오."
"그리고 그렇게 인생과 직장생활을 하지 마시오."
"당신과 같은 사람들 때문에 나 같은 멍청이가 멍이 듭니다."
그는 계속 미안하단다. 왜 미안한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정권도 바뀌고 평소 존경하던 L님이 청장님으로, A님이 차장님으로 오셨다. 나는 얼마뒤 '98년3월23일자로 '서초세무서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경상도 의성골짜기 촌놈을 청·차장님께서 알아주시어 감사드린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 사람 어디어디 근무해서 괜찮을 것'이라는 말의 진의(眞意)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서울시내 서장한다고 무슨 빠끔한 수가 있는가?
금은보화가 막 들어온다는 뜻인가?
그렇게 내가 갖고 싶어 하던 큼지막한 빽이 마구 생긴다는 뜻인가?
일복이 터진다는 소린가?
나는 지방서장 할때가 오히려 좋았다.
지방서장 시절에는 4대(大) 기관장하면 지청장, 시장 군수, 경찰서장과 더불어 세무서장도 거기 들어가지 않는가?
주요 모임에는 항상 초대받고, 지역의 주요 결정에는 한수 거들지 않았는가? 일도 적고 대우받고….
이와는 반대로 서울시내 서장을 와보니 단지 집에서 출퇴근한다는 장점 이외에는 단 하나도 좋은 것이 없었다.
직원 많아 하루도 편할 날이 없고, 세수규모가 커서 할 일도 많아 자기 시간을 좀 체로 낼 수가 없다.
서울 지검장은 얼굴도 못 보고, 구청장도 만나기 어렵고, 교육장과 세관장, 노동부소장들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 대신에 신문·방송기자, 특히 조세관련 신문기자나 경찰서 정보계 형사님들만이 서장실을 오갈 뿐 동장(洞長) 보다도 격이 떨어진 느낌을 받았다.
서장으로서의 품위 유지를 위한 비용은 더 들어 쥐꼬리 판공비로는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서울시내서장을 했으니 괜찮을 거라고 하는 소릴 하는 사람을 보면 즉시 내게로 데려와 주십시오.
어째서 괜찮은지 한번 따져 보려고 합니다.
76. 서장님은 자기직원도 모릅니까?
서초서에 부임한지 6개월쯤 됐을까?
어떤 아가씨가 노크도 없이 불쑥 서장실에 들어와서는 말도 없이 나를 노려보고 서있었다.
새빨간 치마에 검은색 상의, 짙은 화장으로 인해 나는 '외상 술값이 있나?' 하고 잠시 돌이켜 봤다.
사실 나는 술을 잘 못한다. 체질적으로 맞지 않지만 그보다는 아버님이 대신 너무 술을 좋아하셨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서장님은 자기 직원도 모릅니까?"
"서장님이 저에 대해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했다는데 뭔 말을 했습니까?" 라고 묻는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에게 물었다.
치아교정 장치를 하고 있는 것을 보니 그제야 징세계 여직원 9급 'Y○○'임이 생각이 났다. 얼마전에 다른 세무서로 전출간 총무과장이 정상적인 성격이 아니며 특별히 관리해야 한다는 말이 기억난다.
"내가 왜 'Y○○'양을 모르겠나? 무슨 일로 왔어요? Y양"하고 얼른 아는 척하며 물었다.
"서장님이 저에 대해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했다는데 뭔 말을 했습니까?" 라고 묻는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에게 물었다.
"글쎄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누구에게서 들었나요?"
"징세계장에게 들었습니다."
나는 서장실에 들어온 정신이 이상한 여직원에게 봉변을 당한 선배님의 얘기가 기억이 났다.
그래서 얼른 징세계장과 총무과장을 불렀다.
Y양은 히쭉히쭉 웃고 있다.
"징세계장. Y양이 내가 입에 담지 못하는 소리를 했다고 징세계장에게서 들었다는데 무슨 말이요? 이게."
여성계장인 A는 작심을 한듯 단호하게 말을 한다.
"서장님, 저는 여기 'Y○○'와는 같이 일을 못 하겠습니다"라고 서두를 꺼내기 시작한 A계장님은 지금까지 그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Y양은 일을 시켜도 듣지를 않고 혼자서 부기공부만 열중하며, 다른 직원들은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데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먹을 것을 잔뜩 사놓고 계속 군것질을 해대면서 약을 올린다고 했다.
전산입력을 한다고 PC를 잘못 건드렸다가 전부 지워져 버려 직원들이 야근을 한 일도 한두번이 아니라고 했다.
얼마전에는 신랑감을 고른다 하며 행정계에 총각직원 인사기록카드 사본을 떼어달라고 해서 거절을 했더니 안기부에다 고발하겠다고 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하도 답답해 "네가 농땡이 치는 사실을 서장님도 알고 계신다"고 했더니 그게 입에 담지 못하는 말이라면서 서장님께 온 것 같다고 했다.
징세계장이 서초서로 올때 현대에서 축하난(蘭)이 온 것을 보고 현대 정 회장과 징세계장이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고 떠들어 댔다.
서초에 부임해서 보니 이층 삼층으로 올라가는 복도가 너무 침침해서 중간 중간에 예쁘게 만든 조화로 된 꽃바구니를 놓았더니 자기를 무시한다고 화를 내기도 했다.
Y양 자신이 바로 꽃인데 조화를 사다 놓는 것은 예산 낭비라면서 서장을 고발하겠단다.
이쯤되면 그 여직원의 정신상태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런 '또라이'를 정리하는데 나는 특기가 있다.
나는 일단 그의 부모님을 불러 한달간 병가를 내고 정신과 치료를 받게 했다. 그리고 한달후에 서울대학병원이나 삼성의료원의 정신과 진단서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때 가서도 공직을 맡기기에 부적합할 때에는 사표를 받겠다고 다짐을 받았다. 부모님들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담담한 표정으로 딸을 데리고 나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