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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란제 전 FIFA 회장 별세, 월드컵으로 지구촌 묶은 '불세출의 개혁가'

"전 세계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 그것이 바로 축구입니다."

17일(한국시간) 브라질 출신 주앙 아벨란제 전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이 향년 10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저 그런' 이벤트에 지나지 않았던 월드컵을 전 인류가 지켜보는 세계 최고의 스포츠 축제 반열에 올려놓은 아벨란제는 불세출의 개혁가였다.

아벨란제는 24년간(1974~1998) FIFA의 수장 자리를 지키며 그 누구도 실행하지 못했던 축구계의 변화들을 일궈냈다. 특히 행정적 기관이었던 FIFA를 상업화·기업화시키며 외형과 내실을 갖춘 세계적인 단체로 이끌었다.

스폰서도입 등 독자적인 개혁 성향으로 '독재자'라고 불리기도 했고 임기 말 금품 관련 비리들에 휘말리며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아벨란제가 축구 발전에 기여한 업적만큼은 높게 평가할 수 있다.

아벨란제와 FIFA의 인연은 의외의 종목인 수영에서 시작됐다.

1916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태어난 아벨란제는 어려서부터 운동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특히 수영에 소질이 있었던 그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과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 브라질 국가대표 수영·수구 선수로 각각 출전하기도 했다.

수영선수로서의 경력을 바탕으로 1955년 브라질올림픽위원회 위원장(1955~1963년)을 맡은 그는 브라질스포츠연맹 회장(1958~1975년)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1963~2011년)을 역임했다. 그리고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마침내 1974년 제7대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에 선출됐다.

FIFA 회장직을 맡은 그는 본격적으로 스포츠 행정가로서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아벨란제는 취임 첫 해 FIFA의 열악한 재정상황을 지켜보며 '내실다지기'를 최우선 목표로 잡았다. 그리고 축구시장에 '스폰서'를 도입했다.

금전 비리와 관련된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았으나 특유의 카리스마와 친화력으로 이를 극복해낸 그는 축구계에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개혁의 시작은 월드컵부터였다.

월드컵을 진정한 '지구촌의 축제'로 만들고자 했던 아벨란제는 82년 스페인월드컵 때부터 본선진출국 수를 16개국에서 24개국으로 늘렸다. 이어 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는 32개국으로 확대했다.

소수 국가들만 참가하던 기존의 월드컵은 '그들만의 리그'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참가국이 두 배로 늘어나자 경기는 더욱 흥미로워졌고 월드컵을 즐기는 인구 역시 크게 늘어났다. 현재 월드컵이 개최되는 해에 TV로 경기를 시청하는 연인원만 420억명에 달한다.

아벨란제는 인재 발굴과 리그 활성화를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각종 대회를 재편하고 기존에 없던 리그를 출범시키기도 했다.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는 17세 이하(1985년부터 2년마다 개최), 20세 이하(1977년부터 2년마다 개최), 23세 이하(올림픽대회)로 세분화했다. 남자와 마찬가지로 올림픽에 여자축구를 도입(1996년 애틀랜타올림픽부터)해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종목 중 하나로 발전시켰다.

1991년에는 여자 월드컵대회를 출범시켰다. 1999년 미국여자월드컵부터는 참가국을 12개국에서 16개국으로 늘려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1989년에는 실내축구 '풋살'을 보급시켰고 1992년에는 4년마다 열리는 'FIFA 풋살세계선수권대회'를 신설했다.

각 대륙별 국가대항전에서 우승한 챔피언들이 맞붙는 'FIFA 컨페더레이션 컵(1992년부터)'과 6개 대륙의 클럽챔피언들이 실력을 겨루는 'FIFA 클럽세계선수권대회(1997년부터 2년마다 개최)'도 출범시켜 대륙간 축구 교류의 물꼬를 텄다.

아벨란제의 개혁에 힘입어 1974년 141개국이던 FIFA회원국은 1988년 203개국으로 크게 늘어났다. 그는 재임 24년 동안 모든 회원국을 한 번 이상씩 순방하며 정치적인 이유로 억압받던 축구 문제를 해결하고 각국에 축구 프로젝트를 적극 지원하기도 했다.

아벨란제는 후임 제프 블래터(80·스위스) 전 FIFA 회장과 돈독한 파트너 관계를 유지하며 다양한 사업들을 함께 추진했다.

축구가 지구촌 스포츠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아벨란제는 TV의 중요성에 대해 남다른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방송중계권 등을 선점하기 위해 재임 당시 FIFA 개발이사와 사무총장을 맡았던 블래터를 전면에 내세웠다. 스포츠업계의 주요 구성원들과 전략적 협력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던 블래터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아벨란제의 기대에 부응했다.

비즈니스맨으로서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던 블래터는 아벨란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결국 1998년 아벨란제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블래터는 레나르트 요한손(83·스웨덴) 유럽축구연맹(UEFA) 회장을 누르고 제8대 FIFA회장에 당선됐다.

아벨란제의 인생이 항상 오르막은 아니었다.

축구 행정가로서 혁혁한 공을 세우며 존경도 받았지만 임기 말 불거진 각종 의혹들은 그의 인생에 과오로 남기도 했다.

아벨란제는 마케팅 대행사인 ISL로부터 100만 달러의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에 시달리다가 지난 2011년 12월1일 건강상의 이유로 IOC최장수(48년)·최고령(당시 95세) 위원직을 내려놓았다. 비리 혐의를 조사한 IOC가 자격정지 2년 이상의 중징계를 내릴 움직임을 보이자 스스로 물러난 것이다. 그는 IOC의 유일한 종신위원이었다.

FIFA의 성공가도를 이끌었던 스폰서와의 협력관계가 결국 자신의 불명예 퇴임을 종용하게 된 아이러니한 순간이었다.

1988년과 1997년 두 차례 서울을 방문했던 아벨란제는 재임 시절 일본과 가까이 지내 한국과는 다소 서먹서먹한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한국과 일본의 2002년 월드컵 유치경쟁 과정에서는 일본을 편드는 언행으로 한국 국민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월드컵 사상 최초로 '공동개최'라는 절충안을 내놓으며 사태를 일단락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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