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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하기 2025.05.2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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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훈은 옳다" 피날레 지휘 현장, 모든 이들은 한마음이었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의 대표 레퍼토리인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의 소리에는 평소와 달리 날이 서 있었다. 현악기의 활을 켜는 손에서는 한(恨), 관악기을 부는 입술에는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정명훈(62) 예술감독이 마지막으로 서울시향의 포디엄에 오른 30일 밤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약 70분에 걸친 연주를 마친 뒤 정 예술감독이 단원 85명과 일일이 고별 악수를 나눌 때 단원들은 참았던 눈물을 끝내 터뜨리고 말았다.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을 가득 메운 청중 2500명이 기립박수를 15분씩이나 멈추지 않은 가운데 정 감독은 담담하게 악수를 이어나갔다. 일부 청중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정 감독의 '합창'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작년 7월 영국의 3대 축제 중 하나인 '시티오브런던 페스티벌'에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한국 성악가들과 함께 '합창'을 연주해 10여분 간 기립박수를 받은 바 있다.

이날 '합창'도 명불허전이었다. 그러나 서울시향에서 펼치는 마지막 공연인만큼 그의 지휘 자세는 절제됐고 단호했다.

여느 때처럼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에 곡을 붙인 '합창'의 4악장 '환희의 송가' 중 '전 세계의 입맞춤을 받으라'를 서울시향, 합창단과 함께 짧게 연주하며 앙코르를 강렬하게 마쳤다.

박수와 환호를 뒤로 하고 묵묵히 공연장을 빠져나가는 그의 뒷모습에 단원들과 청중은 손키스를 보냈다. 청중은 스스로 준비한 꽃다발을 계속 무대 위에 있는 정 감독에게 건네, 그가 거듭 감사의 인사를 하게끔 만들었다.

서울시향 단원들은 공연 시작 전 청중에게 자신들이 쓴 호소문을 직접 배포했다. 정 감독이 서울시향을 10년 만에 떠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박현정(53) 전 대표의 막말·성추행 의혹에 대해 "인권유린"이라고 규정했다. "박 전 대표의 취임 이후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사무국 직원 27인 중 12인이 퇴사하고, 박 전 대표의 퇴임 이후에도 직원들은 불안,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렸다"며 "박 전 대표의 사무국 직원들 유린으로 사무국 직원들, 서울시향 단원, 정명훈 감독이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단원들의 가슴에는 비둘기 심벌이 매달려 있었다. 자유를 상징한다.

공연장을 찾은 청중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서울시향을 10년 이상 성원했다는 홍성애(64)씨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이런 호소문을 낸다는 자체가 안타깝다"고 말했다. 정 감독이 떠나는 것에 대해서는 "그간 서울시향의 기량이 정말 발전했는데, 안타깝다. 정명훈 감독과 단원들이 호흡을 맞추는 표정만 봐도 그들이 얼마나 교감하고 있는지 알아서 행복했다. 이제 그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으니 아쉽다"고 쓸쓸해했다.

일부에서는 정 감독이 지난 6월14일 15년 간 잡아온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봉을 내려놓으면서 받았던 환송과 비교하며 안타까움을 내비쳤다. 정 감독은 당시 약 2시간30분 간의 연주를 끝내고 라디오 프랑스 필의 마티외 갈레 대표에게 소개를 받은 뒤 단원들과의 추억 등 이 단체를 이끌어온 소감을 객석에 전했다. 공연장을 가득 채운 프랑스 시민들은 기립박수로 그에게 영예를 돌렸다. 그러나 이날 서울시향 마지막 무대에서 그의 목소리는 듣지 못했다.

라디오 프랑스 필은 파리오케스트라, 프랑스국립오케스트라와 함께 프랑스를 대표하는 3대 오케스트라다. 정명훈은 폴란드의 거장 지휘자 마렉 야노프스키에 이어 2000년부터 이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맡아왔다. 임기를 마친 뒤 라디오 프랑스 필 역사상 처음으로 명예 음악감독으로 추대된 바 있다.

공연을 마치고 백스테이지에서 약 20분 간 단원들과 사진을 찍고 인사를 나눈 정 감독은 기자들을 만나 "잘했어 너무 잘했어. 오케스트라도 축하하고 너무 잘했어"라고 말했다. "(서울시향이) 계속 잘하기를 바란다"고 축복했다. 피아니스트 김선욱 등도 백스테이지를 찾았다.

한편, 정 감독과 박 전 대표는 직원들의 호소문을 놓고 진실 공방을 벌이고 있다. 최근 정 감독의 부인인 구모(67)씨까지 사태에 연루됐다는 혐의가 나왔다. 정 감독 측은 그러나 혐의를 부인하고 나섰다. 전날 법률대리인인 법무법인 지평은 "정명훈 지휘자의 부인은 직원들의 인권침해 피해의 구제를 도왔을 뿐이지 허위사실의 유포를 지시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지평은 구씨의 피의사실을 공표하고 명예훼손한 것에 대해 고소를 고려하고 있다.

정 감독의 임기는 31일 끝난다. 재계약으로 가닥이 잡히는 듯했으나 구씨에 대한 의혹 등으로 서울시향 이사회가 재계약을 보류하자 서울시향을 떠나기로 했다. 정 감독은 조만간 프랑스로 출국할 것으로 알려졌다.

2005년 서울시향에 예술고문으로 영입된 정 감독은 2006년부터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활약했다. 아시아 정상급 오케스트라로 발돋움시켰다는 평을 듣고 있다. 국내 마니아층도 양산했다. 정 감독을 영입하기 직전 38.9%이던 유료 객석 점유율은 10년 만인 올해 92.8%로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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