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범죄는 반드시 흔적을 남깁니다. 강력계 형사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사건 해결을 위해 한번 잡은 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집념입니다."
서울 강서경찰서 강력 1팀장 류중국(53) 경위. 그는 끈질긴 집념 하나는 타고난 형사로 정평이 나있다. 그에게는 '퇴근'이라는 개념이 없다. 야근과 철야를 밥 먹듯이 하며 우직하게 강력계를 지켜 온 그는 선후배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다.
시계보다 정확하게 움직이는 그의 별명은 이른바 'FM(원칙이나 규정대로만 한다는 의미)'이다. 26년의 경찰관 인생 중 강력계 경력만 20년이다. 각종 흉악 범죄를 전문적으로 다루며 '산전수전' 모두 겪은 베테랑 형사인 그는 한번 쫓은 범인은 웬만해서 놓치는 법이 없다.
그는 지난 7개월 동안 16.52㎡(5평) 남짓한 낡은 사무실에서 하루에 2~3시간씩 쪽잠을 자며 팀원들과 숙식을 해결했다. 그 결과 자칫 미궁에 빠질 뻔한 '건설업자 청부살인 사건'의 전모를 모두 밝혀냈다.
하지만 베테랑 형사인 그에게도 이번 사건의 범인을 추적하고, 검거하는 과정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지난 3월20일 오후 7시20분 서울 강서구 방화동의 한 건물. 흉기에 수차례 찔린 50대 남성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류 경위와 팀원들은 범인을 추적할 만한 어떠한 단서도 없어 난감했다.
"단순 강도인지 원한에 의한 실인인지, 범인이 남긴 흔적을 찾아 실마리를 풀어내고 추적해야 하는데 당시 현장에는 범인을 특정할 만한 어떠한 증거나 단서가 없었어요. 여느 살인사건 현장과는 상황이 많이 달랐습니다."
그때부터 200일이 넘도록 범인을 쫓는 지루한 추격전이 시작됐다. 수사 초기 범행 시간 전후로 사건 현장 인근 120개가 넘는 폐쇄회로(CC)TV를 직접 확인했다. 또 류 경위와 팀원들은 사건 현장 주변 1457세대를 일일이 돌며 탐문수사를 벌였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성과라고 해봐야 용의자로 추정되는 인물이 '하나의 점'으로 보일 정도로 희미한 CCTV 영상이 전부였다.
류 경위는 "사건 발생 3개월이 넘어가자 주변에서 미제사건으로 남을 수 있겠다는 우려 섞인 시선과 걱정을 느껴졌다"며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쳤지만 강력계 형사로서 자존심이 상해 오기가 발동했고, 나뿐만 아니라 팀원 모두가 범인을 미치도록 잡고 싶은 마음에 처음부터 다시 수사를 하면서 놓친 부분은 없는지 꼼꼼히 따져봤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희미한 단서였지만 사건을 풀 수 있는 유일한 열쇠라 절대 놓칠 수 없었던 그는 팀원들과 원점부터 다시 시작했다. '범인은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는 그의 수사 원칙에 따른 것이다.
이후 사건 발생 3개월이 지난 7월1일 용의자로 추정되는 남성의 발목만 찍힌 CCTV 영상을 확보했다. 또 사건 이후 인근 은행출입기를 이용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고 추적한 끝에 중국동포 김모(48)씨의 인적사항을 확인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김씨 주거지 인근 CCTV를 확보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등에서 걸음걸이 분석 등을 의뢰했다. 이를 통해 체형과 다리 길이 등이 같은 신체적 특징뿐만 아니라 '안짱걸음'으로 걷는 모습까지 일치하는 동일인임을 확인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랄까. 엉켜버린 사건의 실타래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김씨에게 살인을 청부한 사람은 피해자와 5년 넘게 소송전을 벌이던 S건설업체 사장 이모(54)씨로 밝혀졌다.
이모 사장은 지난 2006년 피해자의 K건설업체와 경기도 수원의 아파트 신축공사 과정에서 토지매입 계약을 체결했지만 계약이 파기됐다. 이후 긴 소송전으로 감정의 골이 깊어진 이씨는 평소 알고 지낸 수원 지역 세계 무에타이·킥복싱 연맹 이사 이모(58)씨에게 K건설업체 소송을 담당하는 직원을 살해할 것을 청부한다.
이에 이씨는 평소 알고 지낸 중국 연변 공수도협회장 김씨에게 살인을 부탁하지만 해당 직원이 그만 두는 바람에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후 이씨는 살해할 대상자를 K건설업체 사장으로 바꿨다. 결국 김씨는 지난 3월20일 K건설업체 사장을 살해했다.
지난 6일 김씨를 검거했지만 김씨는 '방화동이 어디인지 모른다'며 범행 사실을 부인했다. 하지만 류 경위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살인을 저지른 흉악범에게 때로는 따뜻한 음식으로 때로는 진심어린 말 한마디로 서서히 마음을 움직였다. 결국 3100만 원을 받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 김씨는 류 경위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여름휴가와 주말, 추석명절까지 반납하고 우직하게 수사한 류 경위와 팀원들에 대한 대가였다.
류 경위는 밥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정도로 가족이나 다름없는 팀원들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숨지지 않았다. 그는 팀장으로 근무하면서 늘 입버릇처럼 팀원들에게 '식구'라고 말한단다.
그는 "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현장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건 내 옆에 있는 동료들"이라며 "강력팀의 가장 큰 힘은 소통을 바탕으로 한 형사들 간의 끈끈한 믿음"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완전범죄를 꿈꾸는 지능범이라도 현장에는 반드시 증거는 남아 있기 마련"이라며 "강력계 형사로서 자존심과 긍지를 가지고 반드시 범인을 검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범죄 현장 최일선에서 뛰어다니는 게 피할 수 없는 강력계 형사의 숙명이라는 그의 인상은 웃을 때와 웃지 않을 때가 무척이나 달랐다.
웃을 때는 '이런 사람이 어떻게 강력범들을 제압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처럼 보였지만,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그 누구보다 매서운 눈빛을 지닌 영락없는 베테랑 강력계 형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