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검색

구독하기 2025.05.23. (금)

내국세

[연재]격동기 국세청 30년, 담담히 꺼내본 일기장(11)

“청장이 좋게 보고 있소”…드디어 길이 열리다

‘소득세 기본통칙’제정을 마무리하다

부임하자마자 내가 해야 할 첫번째 과제는 소득세 기본통칙의 제정을 마무리하는 일이었다. 전임문계장이 초안을 만들어 주었는데 세법 중에서 가장 방대한 조문으로 되어 있는 소득세법에 대한 그동안까지의 주요 질의회신 내용을 조문별로 정리해 책자로 인쇄하여 초안을 만들었다.
이 초안을 한 조문 한 조문 축조심의하여 그 문안의 내용을 법규문안으로 명백하게 재정리한 다음, 뺄 것은 빼고 보완해 추가할 것은 추가하는 방법으로 이 작업을 진행하였다.
당시 소득세기본통칙 심의위원으로 공인회계사 신찬수(申瓚秀) 대표가 참여하였는데 그는 그 방대한 초안을 한 조문도 빠짐없이 다 읽고 일일이 검토 의견을 제시해 주었다. 그의 검토의견은 거의 전부 그대로 채택이 되었다. 아무 보상도 없는 일에 그가 보여준 성실함과 진지함 그리고, 열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고 그런 귀한 분과의 만남을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렇게 해서 소득세기본통칙이 마련되자, 비로소 모든 세법의 기본통칙 제정 작업이 마무리되고 납세자를 위한 새로운 법규 서비스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는 훗날 김수학 국세청장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철희, 장영자 금융부정대출 자료처리, 태산 명동에서 서일필

81년 이철희, 장영자 부부는 신군부 실세의 권력을 업고 희대의 금융 부정대출사건을 일으켰다. 이 일로 정치, 경제, 사회는 심히 혼란스러웠고 검찰은 매스컴의 연일 비리폭로 가운데 수사를 진행하여 기소하였다. 법원의 유죄판결로 사건이 종식된 후 이 사건 관련자들의 금융소득(이자수입)에 대한 과세를 하라고 검찰의 수사자료가 국세청으로 넘어왔다.
우리는 방대한 수사기록을 뒤지면서 금융소득을 받은 자(채권자)와 준 자(채무자)를 구분하고 기간별로 수수한 금액을 확인하여 과세자료 소표를 작성하는 방법으로 이 일에 접근하였다. 그러나 수사 내용만으로는 과세요건을 충족시켜주는 항목을 일일이 확인할 수가 없었다. 금융실명제가 시행되고 있지 않는 당시에는 물론 수사상의 한계가 있었겠지만 그 보다는 우리나라 수사기관의 수사가 얼마나 형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 단면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린 하는 수 없이 과세 가능한 것만 추려서 과세하고 마무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태산 명동에 서일필이라고 온 세상을 요란하게 한 사건이었지만 정부가 세금면에서 건져낸건 미미했다.
신군부 정권은 이철희, 장영자 사건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뒤숭숭한 민심을 수습코자 후속인사를 하였는데 이때 김수학 국세청장이 떠나고 후임으로 제5대 안무혁(安武赫) 국세청장이 취임하였다. 그는 육사 14기, 공병장교 출신으로 전두환 대통령과는 심복이나 다름없는 친밀한 실세 청장이었다.
안무혁 청장은 애국심이 강하고 원칙론자였으며 국세행정에 대해서는 늘 배우는 자세로 임했다. 결재차 청장실 들어가면 결재와 관련없는 재정과 조세의 기초에 관하여 묻고 듣기를 좋아했다. 나는 5월 소득세 확정신고전에 전산실에서 미리 개별 납세자의 전년 소득자료를 처리하여 출력해 주면 일선의 소득세신고 권장과 납세자의 신고에 편의한 점이 많을 것이라는 건의도 하였는데 안 청장께서는 이런 나의 제안을 신선하게 받아들이고 누구보다 신뢰했다.
82년 12월 나는 임복빈 과장과 함께 유럽으로 위로 출장을 떠났다. 영국 국세청에 들러 상속세 행정에 관하여 미팅을 마치고 임창열(林昌烈) 재무관(후에 재경부 장관, 경기지사 역임)이 사준 양고기 요리를 맛있게 먹었다. 귀로에 프랑스 파리, 스웨덴 스톡홀름, 스위스 취리히 등 여러 곳을 관광하고 귀국하였다.
83년 새해가 되었다. 1월 어느 날 내가 밤 늦도록 사무실에 혼자 남아서 일하고 있는 것을 오며가며 지켜 보았던 추경석(秋敬錫) 감사관(후에 국세청장, 건설교통부 장관 역임)이 나를 불러 ‘장 사무관, 좋은 일이 있을거요. 청장이 당신이 열심히 하는걸 알고 좋게 보고 있는 것같소’라고 격려해 주었다.

 

 

1982년 임복빈 과장과 함께 서유럽 여러나라 방문시 파리 세느강변에서 포즈를 취하다.<좌측 필자>

 



Ⅳ. 길이 열리다

1. 벌교세무서장

83년2월11일 벌교세무서장으로 부임하였다.
행시에 합격하여 공직에 들어온지 10년만에 처음으로 세무관서 기관장이 되었다. 벌교세무서는 전국 9개의 3급지 세무서 중의 하나로 서장의 직급은 행정사무관 그대로였지만 다음번 서기관 승진후보 1순위가 되었다는 점에서 기쁨이 컸다.
더구나 벌교세무서의 관할구역은 고흥군과 보성군이었는데 고흥군은 내가 출생한 곳이고 이곳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던 나의 고향이었기에 어쩌면 금의환향한 셈이 되었다.
나는 부임하자마자 ‘납세의 고마움, 친절 봉사로 보답하자’라는 큰 플래카드 보드를 제작하여 건물현관 위에다 부착하고 분위기를 새롭게 했다.

 

 

 

다방 마담들, 세금 내는 보람을 말하다.

당시는 자영사업자가 종업원에게 근로소득을 지급하여도 원천징수를 거의 하지 않고 넘어갔다. 벌교세무서에는 고흥군에 고흥읍, 녹동읍과 보성군에 보성읍, 벌교읍이 있었는데 읍 소재지에는 유난히 소위 티켓다방이 많았다.
나는 여기에 착안하여 1개 다방에 마담 1인에 대해서만은 매월 세금 1만원씩 원천징수의무를 이행할 수 있도록 설득시키고 매월 9일 납부서를 써서 다방으로 보냈는데 업소들이 기꺼이 따라왔다.
얼마 후 보성경찰서 정보과 형사가 찾아와서 듣기에 좋은 이야기를 했다. ‘며칠 전 보성읍내 모다방에를 들렀더니 마담이 자기도 평생 처음으로 세금을 내게 되었다고 하며 너무 기뻐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는 자초지종 이야기를 듣고 위에다 정보보고를 올렸노라고 하였다.

-매주 月·木 연재-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