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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하기 2024.05.03. (금)

내국세

[참여연대 경제프리즘] 국세청은 역사의 바늘을 거꾸로 돌릴텐가

 

 

 

구재이(세무사, 조세개혁센터 실행위원)

 

  

 

지난 10일 일부 언론에서 국세청장이 불법정치자금을 제공한 기업을 대상으로 세무조사를 실시하기로 했다고 보도하자 국세청이 이를 즉각 부인하고 나섰다. 국세청은 "불법 정치자금 준 기업, 국세청 곧 세무조사"라고 보도한 기사가 "사실이 아닌 명백한 오보로서 악의적인 추측기사"라고 강하게 부인했다. 아울러 불법정치자금문제는 검찰수사가 진행 중이므로 국세청은 검찰수사 및 재판결과 등을 보아 지금까지의 관례에 따른 통상적인 세법절차에 따라 처리할 것이고, 세무조사계획은 없다고 해명했다.

 

 

 

불법정치자금 제공 기업에 대해 세무조사하겠다는 국세청장 발언의 사실여부를 굳이 따지고 싶진 않다. 다만 기업이 탈세를 통해 비자금을 조성, 불법대선자금으로 제공한 사실이 분명히 밝혀졌음에도, 검찰수사나 사법부의 재판결과를 보고 판단하겠다는 국세청의 입장을 보면서 참으로 어안이 벙벙하기만 하다.

 

 

 

더구나 지금까지의 관례에 따른 통상적인 세법절차에 따라 처리하겠다고 하여 종전에 불법정치자금을 제공한 기업들을 조사하지 않았던 관례에 비춰 볼 때 국세청의 입장은 사실상 과세권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다. 국세청의 과세권에 묵묵히 순응해온 우리 국민들에 입장에서 보면 정말 분통 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비자금에 대한 과세권행사는 국세청의 책무

 

 

 

불법정치자금에 대한 검찰수사 결과, 작년 대선 당시 삼성, LG, SK, 현대자동차, 한화 등 대부분의 재벌기업들이 예외 없이 불법적인 방법으로 조성한 거액의 비자금을 정당과 정치인에게 제공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들은 계열사나 주요 하청업체와 거래하면서 부외커미션을 수수하거나 가공원가를 계상하는 방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했다.

 

이는 필연적으로 탈세를 수반하는 것이어서, 즉 기업과 기업주가 불법정치자금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법인세 등 조세를 탈루했음을 의미한다. 심지어 몇몇 기업은 불법비자금을 임원명의로 제공함으로써 그 임원이 연말정산시 기부금공제까지 받은 사실까지 밝혀지고 있다.

 

 

 

이렇듯 불법정치자금의 원천인 기업비자금에 대해서는 단순히 검찰 수사자료만 검토해도 탈세혐의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음에도, 국세청은 수년이 걸릴지도 모를 재판결과를 기다리겠다고 한다. 불법정치자금 제공 기업에 대해 세무조사를 하지 않겠다는 것은 국민이 국세청에 부여한 책무를 포기한 명백한 직무유기다.

 

 

 

일반 납세자의 단순 회계처리 오류나 계산착오에 대해서는 즉각적인 세무조사를 실시, 엄정한 과세권을 행사하면서도 재벌기업들이 탈세라는 방법까지 동원해 엄청난 규모의 비자금을 조성했음에도 재판결과를 기다리겠다는 것은 도무지 납득하기 어렵다.

 

 

 

조세탈루 혐의가 명백한 경우, 사전통지를 생략할 정도의 즉각적인 세무조사 대상이라고 세법이 명시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국세청의 태도는 기업들이 증거인멸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는 것으로 참으로 우려스런 일이다. 따라서 국세청은 즉시 세무조사에 착수해 비자금의 총체적 실체와, 기업과 기업주의 탈세액을 확실히 밝혀내야 한다. 그 결과 부정한 방법으로 탈세를 한 사실이 확인되면 조세포탈범으로도 처벌해야 할 것이다.

 

 

 

지금 참여연대가 벌이고 있는 불법정치자금에 대한 탈세제보 및 과세촉구 운동은 과세를 위한 국세청의 조사 및 탈세액 징수를 행정상으로라도 강제하기 위한 것이다. 이에 대해 국세청은 과세 불가능이란 입장만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 국세청이 정치인과 재벌 기업주에게 응당 발동해야 할 과세권을 포기하고 있는 것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국세청은 역사의 바늘을 거꾸로 돌리지 말라

 

 

 

검찰수사가 불법정치자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면, 국세청의 조사 및 과세는 비자금 제공·수수 관행을 척결해 기업투명성을 해치는 모든 불법적 자금줄을 근절하기 위한 것으로, 검찰조사만큼이나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정치인이 받은 불법정치자금에 대해서는 엄정히 과세하고, 이를 제공한 기업과 기업주를 상대로는 엄정한 세무조사를 통해 탈세를 끝까지 추적, 밝혀내는 조세시스템 구축이 시급하다. 이 시스템이 만들어지면 정치인과 기업이 검은 거래의 유혹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져, 조세정의는 물론 기업의 투명성도 크게 향상될 것이다.

 

 

 

일부에서는 불법정치자금을 수수한 기업에 대한 세무조사가 정치탄압이나 재벌 길들이기라는 우려의 시선을 보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법정치자금을 받은 정치인에게 증여세를 부과하고, 기업과 기업주에게 자금의 조성경위와 유통과정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하는 것은 명백히 드러난 조세탈루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것으로, 세무조사의 본질과 고유기능에도 부합한다. 이는 부동산투기에 대한 세무조사와 하등 다를 게 없다.

 

 

 

검찰수사와 국세청의 조사는 엄연히 그 필요성과 성격은 물론 범주도 다르다. 검찰수사는 불법정치자금 얼마가 오고갔는 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따라서 불법정치자금의 원천인 비자금의 실체까지 정확히 밝히는 것은 근본적으로 힘들다.

 

 

 

사실 이번 검찰수사로 불법정치자금으로 지출된 비자금의 일부분이 확인됐을 뿐이다. 좀처럼 찾기 힘든 기업비자금의 꼬리가 밟힌 이상 탈세를 단속해야 할 국세청은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만일 과거 검찰의 정치자금 수사 때와 마찬가지로 국세청이 이번에도 침묵으로 일관한다면 한국사회의 고질병폐인 기업비자금의 고리는 앞으로도 계속 국민들의 피땀을 빨 것이다. 정경유착은 여전히 건재할 것이고, 국세청이 강조하는 공평과세와 조세정의는 물론 국가 및 기업의 진정한 경쟁력 및 신인도 회복도 요원할 수 밖에 없다. 국세청은 역사의 바늘을 거꾸로, 거꾸로만 돌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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