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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하기 2024.04.2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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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제의 정치학, '부자증세' 큰 틀 짰지만 시기는 선거 뒤로

섣부른 증세 논의, 국민 반발만 불러올라

상당수의 유권자들이 이미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복지 확대를 위한 증세는 입에 담기 까다로운 불편한 진실이기에 시기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현 정부가 종합부동산세 도입으로 '세금폭탄' 프레임을 뒤집어 쓴 참여정부를 계승했다는 점에서 그 때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2일 새 정부의 인수위원회 역할을 하는 국정기획자문위원회와 기획재정부 등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가 '부자증세'라는 큰 틀의 조세개혁 방향을 밝혔다. 다만 중장기 과제로 신중히 검토할 방침이다.

 최근 경유세 인상, 근로소득세 면세자 비율 감축 등 일련의 세제 관련 이슈가 화젯거리로 떠오른 것과 관련해 국민들의 뜨거운 관심을 잠재우고자 정부의 대략적인 방향은 제시한 것이다.

 대신 모든 공은 새로 설립될 조세·재정개혁 특별위원회에 넘김으로써 당분간은 허니문 효과를 누리려는 모양새다. 특위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특히 증세 관련 논의들을 주로 다룰 계획인데 올 하반기부터 가동해 내년에 보고서를 내놓을 예정이다. 내년 지방선거 이후로 시기를 미룬 것이다.
 
◇서민증세 논란에 지지율 떨어질라···황급히 차단

 최근 새 정부의 경제정책 분야에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것은 세제 관련 이슈다. 경유세 인상 가능성과 관련한 보도가 도화선이 됐다.

기획재정부 세제실은 지난 26일 긴급 브리핑을 열어 "경유 상대가격 인상의 실효성이 낮게 나타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정부는 경유세율을 인상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근로소득세 면세자 비율 축소와 관련해서도 "당분간 비율을 급격히 낮출 계획이 없다"며 "중장기적으로 신중히 검토할 사안"이라고 말했다.

 통상 정부는 8월 발표되는 세제개편안을 위해 조세재정연구원 등에 연구용역을 맡긴 결과를 주제로 공청회를 연다. 사회적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 정부가 일방적으로 추진하기엔 부담스러운 주제를 노출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여론 수렴을 하려는 것이 공청회의 목적이다.

 올해는 ▲소득세 공제제도 개선방안 ▲주세 과세체계의 합리적 개편방안 ▲상속·증여세 과세체계 개편 ▲에너지 상대가격 합리적 조정방안 검토 등 4건의 공청회가 완료됐거나 예정돼 있다. 경유세가 인상되거나 면세자 비율이 축소된다면 서민층의 세금이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경유세 인상의 경우 국민들의 저항이 만만찮다는 것을 확인한 정부는 아직 공청회도 열리기 전에 "인상은 없다"는 점을 못 박았다. 국정기획위 역시 민감한 주제는 중장기 과제로 묶어놓겠다고 밝힌데다 기재부가 기획하고 있는 세제개편안을 발표 전 미리 알리기도 했다.

 올해 정기국회에 제출될 세제개편안에는 월세 세입자 지원을 강화하기 위한 월세 세액공제율 확대, 소기업·소상공인의 부담 경감을 위한 근로소득증대세제 확대, 폐업한 자영업자의 소액체납에 대한 한시적 면제 등 세제혜택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새 정부가 5월에 출범해 증세 관련 논의가 설익은데다 지방선거를 끝낸 내년부터 구체적으로 논의하는 것이 낫겠다는 정무적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세금폭탄 프레임 또 씌일라 전전긍긍

 정부가 '증세'라는 단어에 이 같이 알러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참여정부 시절 종합부동산세(종부세) 도입으로 '세금폭탄' 프레임에 발목을 잡힌 상처도 한 몫 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대선 과정에서도 문재인 당시 후보는 복지 확대 공약에 비해 증세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없다는 공격을 받은 바 있다. 

 집을 여러 채 보유한 다주택자에게 보유하는 종부세는 과세 대상이 국민의 2%에 그치는 실정이었다. 부자들로부터 세금을 걷어 조세재정정책의 소득재분배 효과를 보겠다는 것이 종부세 도입의 이유였다.

 그러나 보수층이 만들어낸 '세금폭탄' 프레임은 예상보다 강력했다. 집 한 채 가지지 못해 종부세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서민들마저 정부를 비판했다. 증세해서 조세 형평성을 제고하려다 인심을 잃은 노무현 정부는 감세를 통한 고성장을 주장한 이명박 정부에 정권을 내줘야 했다. 증세와 감세가 선악논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지점이다.

 경제를 살리겠다던 이명박 정부는 대기업에 대한 법인세율을 25%에서 22%로인하했다. 이를 진보세력은 '부자 감세'라고 불렀다. 

 박광온 국정기획위 대변인(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문재인 정부의 조세개혁 방향은 그간의 부자감세 정책으로 왜곡된 세제를 정상화하는 등 조세정의 실현을 통해 조세의 소득재분배 기능을 강화해 더불어 잘 사는 경제를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의원은 "이를 위해 대기업, 대주주, 고소득자, 자산소득자에 대한 과세는 강화하겠다"며 "자영업자, 소상공인 등 중산·서민층에 대한 세제지원은 지속적으로 확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증세 관련 합의의 틀 마련이 앞으로의 과제

 국민의 반대 여론에도 조율 과정 없이 증세를 밀어붙일 경우 그 역풍은 고스란히 정부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정부의 담뱃세 인상이 대표적 예다.

 국정기획위는 조세·재정개혁 특위를 설치해 증세 논의를 하는 이유에 대해 "법인세율 인상, 에너지 세제 개편 등 사회적 이해관계가 첨예한 문제들을 국민적 합의와 동의를 얻어 추진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꾸준한 소통을 통해 복지 확대를 위한 증세 찬성 여론을 높이는 일도 관건이다. 다만 '세금을 공평하게 걷지 않고 있다'는 인식이 크다는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가 한국사회학회에 의뢰해 최근 발표한 '조세에 대한 국민의식과 태도연구(2015)'에 의하면 복지 확대로 인해 필요한 추가 재정 부담을 위해 세금을 더 낼 용의가 있다는 의견은 절반 정도에 그쳤다.

 한준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조세 형평성이 낮다는 점이 납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가장 큰 이유"라며 "세제의 소득불평등 완화 여부에 대해서도 연구와 개발이 필요하다"고 짚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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