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일없는 세무서장 자리
이리세무서는 벌교세무서에 비하여 관할지역이 넓고 일이 많았다.
인구 20만명의 이리시와 익산군 전역을 관할했고, 이리공단에는 공장들이 많이 들어서 활발하게 가동되고 있었고, 금융기관의 예금 수신고도 전주에 이어 전북에서 2위였다. 77년 이리역 열차 화약폭발사건 이후 이리역 부근의 지저분한 사창가가 제거되고 시내 도로망이 정비되어서 도시의 모습이 새롭게 일신되고 있었다.
세무서장으로서의 나의 일상은 매우 바빴다. 기관장으로서 대외적으로는 여러 행사와 모임에 참석해야만 했고, 대내적으로는 각 과의 업무를 지휘하고 결재를 진행해야만 했다. 매일 체납복명을 받고, 직․간세 주요 세목의 신고기간이 되면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면서 친절봉사와 세정 정화에 신경을 많이 쓰도록 긴장된 분위기를 조성해야만 했다.
재산제세 과세자료가 많아 벌교세무서장 시절처럼 한건 한건 가르쳐 가면서 결재할 수가 없었다.
나는 서장실에 결재해 달라고 한꺼번에 수백 건씩 쌓아 놓은 자료를 한장씩 쭉쭉 넘기면서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만 골라 놓고 나머지는 일괄해서 도장을 찍게 하고 골라 놓은 자료는 문제점을 지적해 보완토록 하였다. 재산세계장(왕연수)는 어떻게 그렇게 한 눈에 찝어 낼 수 있느냐고 놀라워했다. 나는 그 때마다 ‘이건, 왕 계장이 할 일 아니오?’라고 하면 그는 늘 겸연쩍게 웃었다.
쓸모없는 C/R영수증 주고받기 운동
그 당시 업무 중에 영수증 주고받기 업무는 지방청 5대 역점사업 중의 하나였다. 업소에 금전등록기 설치를 권장하고 사용 여부를 수시로 확인해야만 했다. 일선 세무서에서는 매월 금전등록기 영수증을 수집해 지방청으로 보내고 지방청은 수집 건수의 많고 적음을 평가해 서별로 순위를 매겼다. 이렇게 수집된 영수증 가마니는 창고에 잠시 보관해 뒀다가 불살라 없애 버렸다.
금전등록기는 사업자가 자기 영업점 내부 통제를 위해 설치하는 수단일 뿐이고 찍는 데로 신고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크로스 체크할 방도가 없었다. 왜냐하면 수집된 그 많은 영수증을 건건이 전산실에서 입력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사업자의 세금신고와 아무 연관이 없는 금전등록기(C/R) 영수증 주고받기 운동을 부가가치세 법에 규정을 두면서까지 왜 하고 있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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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국세청은 현금수입업소들의 과표양성화를 위해 대대적인 ‘관인영수증 주고받기’ 운동을 전개했다. 음식점은 물론 모든 도소매점들은 카운터에 ‘당 점포는 관인영수증을 발행합니다’라는 팻말을 비치토록 하는 등 관인영수증 발급을 강력히 독려했다. 당시 한 한약방에서 한 고객이 업주로부터 영수증을 받고 있는 모습.<세정신문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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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가 없으면 세원관리도, 직원관리도 어려워
나는 부가가치세 행정의 중점을 세부담의 상대적 공평성 확보에 두고 이를 위해 음식업, 숙박업, 소매업 및 서비스업종 등 현금수입업소의 매출액을 업종별로 권형을 맞추도록 하였다. 이리는 호남의 교통의 요충지라서 여관업이 성행했는데 과에서 작성해 올린 여관업 권형 자료를 보니 시내에서 가장 최근에 지어 깨끗하고 영업이 잘 되는 ○○여관이 누락되어 있었다. 이런식으로 직원들이 장난(?)을 하면 관리자가 체크할 길이 없었다.
대부분의 과장과 주무는 전주에서 출퇴근을 하고 있어 지역사정을 잘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나는 가족과 함께 시내에 살면서 주말과 주일이면 시내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까닭에 시내 지리와 업소의 제반 사정을 상대적으로 잘 알 수 있었고, 이것이 직원들을 관리·감독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이리에 이사하자마자 시내 중심에 위치한 신광교회에 가족과 함께 출석하였다.
당시 담임 목사이신 안경운 목사님은 세무서장이 교회에 나온 것은 처음이라며 나를 무척 좋아했다. 교인들로부터 선물을 받으면 허리띠, 화장품 등등을 나에게 주시곤 했다. 어느 날 한 교인이 아내에게 제보를 했다. 세무서 某 직원이 某 사업자한테서 거액(?)의 금품을 챙겨갔다는 것이었다. 나는 즉시 개인적으로 불러 확인하고 은밀하게 돌려주게 했다. 3천명 이상이 출석하는 교회이다 보니 교인들을 통해 이런저런 제보들이 계속 들어와 사전에 조용히 처리할 수 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말 한마디
86년2월15일 안무혁 국세청장께서 다시 이리세무서를 순시했다. 이근영 광주청장과 이상혁 본청 기획관리실장이 함께 보좌했다.
업무보고가 끝나고 이리 인터체인지까지 배웅한 이근영 지방청장이 다시 이리세무서로 돌아와서 나에게 ‘짱꼴라(이 청장께서 나를 부르는 호칭) 당신 이번 인사 때 서울로 올라가기 힘들 것 같애. 광주청 서장 중에서 누구를 꼽느냐고 물어보기에 난 당신을 말했는데 아직 빠르다면서 광주청 국장을 거쳐 올라오는 것이 좋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청장님, 이것저것 재다보면 좋은 사람 못 키웁니다. 청장님께서 영원히 국세청장 자리에 계실 순 없지 않습니까라고 말했지. 그러더니 그렇게 알고 있어’라고 말해 주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 이 문제를 놓고 아내와 함께 골방에 앉아 간절히 기도했는데 나도 모르게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마음속이 평안함으로 채워지면서 서울로 올라가도 좋고 못 올라가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로부터 12일 후에 서울청 간세국으로 발령이 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계속>-매주 月·木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