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들었던 대구를 떠나
당시 필자는 뜻뜻한 공직자로 근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심한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
왜냐하면 또래 친구들은 대학교에 진학해 대학생 제복를 입고 배지까지 달고 다니는 모습에 필자의 마음이 몹시 상했었다. 그들은 마음껏 대학생으로서의 젊음을 즐기고 있었지만 나는 말단 공무원으로서 이들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어 외톨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 마음을 가져서인지 몰라도 내 마음 한구석에는 대학생이 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이듬해인 1967년, 당시 야간부 대학으로 잘 알려진 대구청구대학에 응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1년 동안이나 책을 멀리 했으니 합격이나 될까 몹시도 염려했는데, 시험 결과는 예상과는 달리 야간부 전체 수석합격이라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물론 4년간의 등록금이 모두 면제가 되는 전면 장학생이 된 것이었다.
그래서 낮에는 애송이 세금쟁이, 밤에는 대학생 신분이라는 이중생활을 하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모시고 있는 대구서부세무서장으로 계시던 아버지 같은 김경남(작고) 서장님께서 서장실로 필자를 불러 말씀하시기를
“조용근 서기! 자네는 세무서를 그만두고 공부를 계속하는 것이 어떤가? 내가 계속 뒤를 돌봐줄 테니 공부를 계속 해보게” 라고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다.
그때 내 가슴이 찡하면서 갑자기 눈물이 났다.
“서장님 말씀 진심으로 고맙습니다만, 제가 주경야독을 해서라도 꼭 성공해 보겠습니다” 라고 대답하고선 서장실을 나왔다.
지금도 인자한 그 분의 말씀을 잊을 수가 없다. 아버지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한 진한 사랑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필자는 조사과 조사계를 떠나 법인세과로 옮기게 됐다. 그 당시 뜻있는 주위 분들이 세금쟁이로 성공하려면 반드시 법인세 업무를 배워야 한다며 철부지같은 필자를 어여삐 여겨서인지 법인세과로 옮겨 근무하게 됐다.
당시 법인세과에 근무하시는 분들은 모두 아버지나 아니면 삼촌뻘이었다. 또 사무실 분위기도 몹시 엄숙해 보이기까지 해 함부로 말도 못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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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근 세무법인 석성 회장은 지난 1984년 선친이 남긴 유산 5000만원을 기반으로 1994년 '석성장학회'를 발족해 개인적으로 운영해 오다가 2001년 3억원의 기금으로 재단법인을 설립했다. 석성장학회는 94년부터 창립 20주년을 맞은 현재까지 2천여명의 중·고·대학생들에게 총 16억원, 매년 1억 5천만원 상당의 장학금을 지급했으며, 이중 70~80%는 형평이 어려운 국세청 직원 자녀에게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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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또 한번의 실수가 있었다. 술대접(?)을 잘못 받았던 사실을 가까이 있는 뜻있는 지인이 제보해 세무서 자체 정기 인사이동때 ‘관재과’라고 부르던 재산관리과(국유재산의 관리 및 매각업무를 담당)로 전출됐던 것이다.
필자는 그 진위도 모르고 관재과로 옮겨 나름대로 국유재산 관련 법을 열심히 배우게 되었다.
어찌 보면 그것이 전화위복이 된 셈이기도 했다. 세금쟁이 40년동안 이때 약 1년간의 기간 중에 관재업무까지도 익힐 수 있었으니 지금 되돌아 보면, 그때 그 실수가 필자로 하여금 조금씩 성장해 나가도록 하는 하나의 징검다리 역할을 해준 것이다.
그렇다고 필자는 그때 그 실수를 정당화하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래도 철부지인 필자는 9급 말단 공무원으로서 아무런 개념 없이(?) 윗분들이 시키는 일만은 열심히 했다.
1968년 1월 중순 추운 겨울날 혼자서 대구시 내에서 2시간 가량이나 떨어진 고령군 외딴 산골에 있는 방앗간의 체납세금 2천원을 받기 위해 하루 한번밖에 없는 시골버스를 타고 가서 직접 체납세금 2천원을 받아 현지 막걸리 양조장 직원숙소에서 잠을 자고 이튿날 걸어서 면사무소에 있는 우체국에 직접 납부하던 일들을 비롯해서….
그러나 필자의 마음에는 왠지 모르게 허전함이 있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필자보다 공부를 못하던 친구들이 서울에서 대학에 다닌다고 자랑하며 방학 때가 되면 대구에 내려와 폼(?)을 잡는 모습을 보면서 내 자신이 얼마나 처량했던지….
그래서 1968년 3월에 나는 기어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당시 필자가 다니던 청구대학이 대구대학과 합병해서 영남대학교로 출발해 지금은 명실상부하게 대구지역 명문대학교로 자리잡았지만 그 때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필자는 어쨌든 서울로 가서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결심 끝에 서울 출장을 신청해 야간열차를 타고 서울시 종로구 명문동에 있는 성균관대학교 야간대학 상학과(지금의 경영학과)에 편입시험을 응시하게 되었다.
2명을 뽑는데 68명이 응시했다. 시험을 치루고 곧바로 야간열차를 타고 대구에 내려와 하던 세무서 일을 계속 하고 있는데 성균관대학교로부터 합격했으니 입학 수속을 밟으라는 축하 전보문을 받게 됐다.
뜻밖이였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대구에서 서울에 있는 성균관대학교에 다닐 수가 없는 형국이었다.
그때 한분이 생각났다. 당시 세정감독관(지금의 감사관)으로 계시는 조용대 형님, 어찌 보면 집안의 형님 뻘이었다. 편지를 썼다. 필자가 세금공무원이 된 사연, 집안 이야기와 함께 성균관대학교 야간대학 편입시험에 합격했다는 사실, 그리고 장래희망 등을 진솔하게 썼다.
몇일후 답장이 왔다. 국세청 본청에서는 얼마 있으면 수도권에 많은 세무공무원을 배치하기 위해 지방에 있는 우수한 인력을 뽑아 올릴 예정이니 그때 발령받을 수 있도록 직접 인사부서에 추천하겠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나는 한없이 기뻤다.
그 후 성균관대학교 수강신청을 할 즈음 국세청으로부터 인사발령 통지가 왔다. 성균관대학교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동대문세무서로 배치를 받았다. 또 한번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드디어 1968년5월1일, 정든 대구를 떠나 약 2년 가까운 대구서부세무서 9급 공무원의 철부지 세금쟁이 시대를 마감하게 됐다.
<계속>-매주 水·金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