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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하기 2025.05.22. (목)

내국세

[연재]“나는 평생 세금쟁이”(2)

“국세청 개청 첫해, 운명처럼 연을 맺어”

내가 세금쟁이가 된 기막힌 사연

지금부터 세월의 필름을 1966년대로 거슬러 되돌려보고자 한다. 1966년하면 우리 국세청으로서는 잊지 못할 때다. 다름 아닌 ‘국세청(國稅庁)’이라는 독립기구로 출범된 것이 바로 그 해였으니, ‘1966년 3월3일’, 이날이 바로 ‘국세청’ 문을 처음으로 연 날이라는 것을…
필자는 그 해 1966년 1월에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가난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한 채 몹시 낙망해하고 있던 여느 차가운 겨울 아침, 집으로 배달된 서울신문의 희한한 채용광고 하나가 내 눈길을 강하게 이끌었다.
‘사세직(司稅職) 5급을(乙)류 공무원 임용시험 공고’, 사세직((司稅職)이라는 글자의 뜻도 모르던 약관 20세의 고등학교 졸업생인 나에게 그 광고 기사 하나에 초점을 맞추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시험 과목이였다.
국어, 영어, 수학 그리고 일반상식, 그리고 맨 하단에 ‘상업부기(商業簿記)’라는 시험과목이라는 단어가 내 눈에 들어오게 됐다.

당시 나는 상업부기라는 교과과목이 없는 인문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때 우연히 내가 다녔던 중학교의 김석규 선생님이 우리 고등학교를 전근오시게 되었는데 그분의 담당과목이 바로 상업부기였다.
참고로 그 당시 필자가 진학하고자 했던 대학교의 상과대학에서는 입시과목으로 ‘독일어’와 ‘상업부기’를 선택과목으로 하도록 돼 있었는데 나는 독일어를 선택해 공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선생님께서 교무실로 필자를 호출해 “용근아 너는 선택과목을 무엇으로 하고 있느냐?” 하시기에 ‘독일어’를 선택과목으로 한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독일어를 선택하지 말고 당장 자기가 가르치는 ‘상업부기’를 수강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수업에 꼭 참석하라는 엄명(?)을 내리셨다.
아울러 선생님께선 친구들도 많이 데리고 오라는 당부도 잊지 않으셨다.
그때 필자는 몹시 갈등했으나 선생님과의 개인적인 친분관계를 생각해서 몇몇 친구들과 함께 상업부기 과목을 수강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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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근 천안함재단 이사장이 2012년6월8일 해군본부에서 특강을 하고 있다

 



그래서 졸업 때까지 약 2년간에 걸쳐서 상업부기를 공부하게 됐는데, 바로 그 선택과목이 지금 내 눈앞, 여기에 나와 있지 않는가!!!
국어, 영어, 수학 등은 내가 목표로 하는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했던 터라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고, 상업부기는 2년간이나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여 놓은 터라 왠지 모르게 이 채용 공고문 기사에 구미가 당겼다.
참고로 당시 상업고등학교에서는 취업을 위해서 상업부기 과목은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있었지만 국어, 영어, 수학과목은 아마도 인문고등학교에 비해 수준이 다소 낮은 것이 추세였다. 그러나 필자의 경우에는 양자 모두를 제대로 갖췄다는 생각을 하니 바로 이 채용 공고문은 나를 위한 것이구나라는 자신감이 들었다. 그래서 바로 그 시험에 원서를 제출하게 됐다.

당시 국세청으로서는 개청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 보니 과거에도 없었던 많은 직원들을 뽑게 됐는데 500명을 뽑는 그 시험에 무려 5만명 이상의 지원자가 몰렸다.
참고로 지금도 그랬지만 당시에도 실업률이 너무 높아 젊은 청년들이 취업하기가 매우 어려웠었다.
살인적인 경쟁률이었지만 결국 당당히 합격을 했는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 내 성적은 전체 합격자중 군필자와 원호대상자들에게 일정한 가산점을 준 것을 감안하면 매우 우수한 성적이었다고 한다.
합격자를 발표하고 난 후 몇일후에 국세청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근무하고 싶은 세무관서를 지원하라고…. 서울로 가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지만 당연히 나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인근 대구서부세무서로 지원을 했고 드디어 1966년6월20일 대구서부세무서로 발령받아 첫 출근을 하게 됐다.
<계속> -매주 水·金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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