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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하기 2025.05.23. (금)

내국세

[연재]격동기 국세청 30년, 담담히 꺼내본 일기장(12)

‘키는 째깐한 것이 배짱은 있네’ 고질체납자와 일전

경청만 해 주어도 납세자는 한이 풀린다

벌교세무서장으로 부임하면서 나는 우선 장기 고액 체납부터 챙겼다. 그 중에 제일 큰 것이 고흥읍 이상하 노인의 증여세 체납이었다.
그는 고흥의 큰 지주로 노년이 되어 출향한 아들들에게 간척한 농지를 증여하고 연부연납을 허가받았는데 이를 허락한 당시 서장이 그해 연말에 이를 취소해 버린 바람에 체납이 되어 있었다.
나는 민공식 직세과장을 대동하고 조그만 과일 꾸러미를 들고 90세된 영감댁을 찾았다. 그는 이 일로 화병이 나서 거동이 어려웠고 귀도 멀어서 직세과장이 종이에 써보이며 나와 오후나절 내내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감은 매우 상기된 채 이야기를 쉴 새 없이 하였고 우리는 듣기만 하였다. 그는 나의 전전임 서장에 대한 원한이 가슴에 맺혔노라고 하시며 이제 서장 앞에서 다 토하고 나니 살 것 같다고 하였다. 나는 그대로 돌아왔다. 그후에 나는 개인편지 형식으로 친필로 사신을 써서 직세과장 손에 들려 보냈다. 체납된 세금의 납부를 결심해 달라고 간곡히 당부한 내용이었다.
그 때부터 영감은 마음속의 응어리가 풀려서 소유 부동산을 매각하여 분납하는 방법으로 이 체납세금을 완납해 주었다.
나는 이 일을 통해서 납세자의 이야기를 오래 참고 들어준다는 것이 민원을 해결하는데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절실하게 깨달았다.

버스정류소 창구 매표 수입을 압류하다

보성읍에 시외버스정류장 사업자 L씨가 있었는데 매번 부가가치세 신고 때마다 신고서는 접수하고 세금은 계속 체납해 애를 먹였다.
나는 비상대책을 간구하기로 하였다. 버스티켓 매표소 창구에 총부과장(당시 김중완)과 체격이 건장한 직원들을 배치시키고 창구에 들어오는 현금을 압류하기로 하였다. 나는 광주에 있는 여객 버스회사 본사에 이 사실을 알리고 이영상 지방청장께도 전화보고 해 매스컴에 보도가 나더라도 알고 계시라고 하였다. 보성경찰서장께는 현장에 경찰 배치를 협조 요청했다. 매사 지혜롭고 믿음직스러운 총무과장의 지휘하에 우리 비상대책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지방청장은 크게 칭찬해 주었다.

 

당시에도 체납정리업무는 국세행정의 큰 골칫거리였다. 체납정리를 위해 TV, 냉장고는 물론 자동차를 압류하는 경우도 많았다. 사진은 체납처분을 위해 압류된 3륜 자동차들이 서울 성수동(뚝섬) 한 대로변 공터에 모아져 있다. <세정신문DB>

 



골똘히 생각해보면 길이 보인다

우리 세무서 바로 정문 앞에서 비닐제품 장사를 하는 김YR이라는 사람은 500여만원의 세금을 몇년간 내지 않고 부인 명의로 장사를 하면서 버티고 있었다. 내가 서장실 유리창으로 내려다 보니 장사는 잘 되는 편이었고 트럭이 한대 들락날락 하였다. 세무서 코앞에서 계속 사업을 하면서 밀린 세금을 안낸다는 것은 세무서와 세무서장을 허수아비로 아는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벌교 장날에 간세과장을 시켜 주차해 놓은 트럭을 밀고 와서 세무서 마당에 계류해 놓고 철사줄로 문짝과 손잡이 등을 꽁꽁 묶은 다음 봉인을 하였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김씨는 술에 잔뜩 취해가지고 세무서 1층 화단에 드러누워 오후나절 내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는 아무도 접근하지도 말고 상대하지도 말게 하였다. 그는 삼청교육대 출신으로 벌교가 알아주는 주먹이었다. 그 날 저녁 직원들이 퇴근해 버리고 서에는 나와 세 과장만 남았다.
나는 총무과장을 시켜 그를 2층 서장실로 데려오게 했다.
그는 여전히 소리를 질렀다. 과장들을 내보내고 자리에 앉게 한 다음 서장인 나에게 먼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라고 하였다. 그는 나를 노려보면서 ‘키는 째깐한 것이 배짱은 있네’라고 하였다. 나는 ‘당신은 사업을 계속하여 돈이 분명히 있는데 왜 세금을 안내고 버티느냐?’고 말하고 있는데 그의 사촌동생이 문을 열고 들어와 ‘형님, 여기가 어딘데 이러고 있느냐’면서 데리고 나갔다.
여름 내내 그 트럭은 세무서 마당에 흉물스럽게 서서 출근하는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동여매 놓은 철사 줄에서는 녹이나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해 가을 어느 날 고흥 출장길에서 보니 벌교읍 장좌리에 20여채의 깔끔한 주택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난 순간 김이 번 돈으로 혹 여기에 투자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미쳤다. 순천에 있는 건설업자에게 확인한 결과 김이 2채나 계약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나는 조건부 압류통지서를 작성케 하여 우선 김한테 슬쩍 보이라고 하였다. 그 다음날 아침 출근하면서 보니 세무서 마당에 트럭이 없어졌다. 김이 밤에 총무과장을 찾아와 체납 세금을 내고 사람들이 볼까 봐 밤중에 차를 빼내 갔다고 하였다. 나는 이런 식으로 관내 4개 읍에서 세금을 안내고 버티는 납세자를 1명씩 골라 일벌백계(一罰百戒)로 본보기를 삼았다.

<계속> -매주 月·木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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