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근 천안함재단 이사장(전 대전국세청장·전 한국세무사회 회장)
지난달 2일, 경기도 여주에 소재한 소망교도소는 모처럼 진한 감동으로 물들었다. 조용근 천안함재단 이사장의 특강을 듣던 재소자들이 그동안 꽉 닫고 살던 가슴의 문을 이날만은 활짝 열어 젖혔다. 강의가 시작되기 전만 해도 서로 눈을 마주치기가 어려울 정도로 매섭고 한서린 듯 했던 눈망울들이 조용근 회장의 강의가 끝날 무렵에는 뜨거운 눈물을 쏟아낸 것이다.
무엇이 콘크리트보다 더 딱딱한 것 같은 재소자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일까.
바로 조용근 회장이 살아온 역정이 자신들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어느 한순간의 실수가 삶을 완전히 바꿔 놓은데 대한 뜨거운 회한과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움텄기 때문 아닐까.
이제 ‘나눔 전도사’ 조용근 회장의 특강은 미국 교포사회에서도 ‘감동 스토리’로 각인돼 앵콜 로드쇼까지 했을 정도다.
그를 찾는 곳은 장애인단체와 사회복지단체 등 소외된 이웃들을 필두로 기업체를 포함한 경제계, 전국 세무관서, 검찰과 경찰, 육해공 국군장병, 교도소, 해외 동포 등 영역이 없다.
조용근 회장을 그토록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말을 잘해서? 아니다.
자신의 망가지는 모습까지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 놓고, 역경을 이겨낸 과정을 여과없이 쏟아놓기 때문이다. 강의를 들어본 사람들은 그의 강의 속에서 까마득히 잊고 있던 ‘나 자신’을 발견한다고 한다. 나아가 ‘삶의 가치’ ‘인생의 좌표’까지 그리게 한다고 했다.
그 조용근 회장이 바로 국세공무원 출신이다. 9급 말단에서 시작해 지방국세청장까지 역임한 실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현직에 있을 때나 지금이나 자신이 국세공무원이었다는 사실이 항상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60년대 국세청 초창기 시절 某 선배가 '부끄럽다'며 달고 다니지 말라고 하는 국세청 배지를 그는 보라는 듯이 더 달고 다녔다. 그만큼 국세청과 국세공무원직을 사랑하고, 자랑스러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용근 회장의 국세공무원 사랑은 그가 운영하는 석성장학회를 통한 국세공무원자녀 장학금 지원에서도 엿볼 수 있다. 석성장학회는 지금까지 생활이 어려운 국세공무원 자녀 등 2천여명에게 총 16억원의 장학금을 지급했으며, 앞으로도 장학금 지급은 계속 될 것이라고 한다.
조용근 회장에게 말단 국세공무원 직원 시절부터 오늘까지의 애환과 역정 집필을 요청했다. ‘곱지 않은 눈초리로 바라보는 국세공무원들에 대한 세간의 오해를 풀어 주는 것도 국세공무원을 남다르게 사랑하는 국세인으로서, 아니 선배로서 해야 할 일 아닌가’ 라는 본지의 강권에 그는 수차례 망설임 끝에 집필을 승낙했다.
자신을 내던지며 토해내는 역경을 이겨낸 감동스토리들은 많은 후배 공직자들 뿐만 아니라 성공을 꿈꾸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귀중한 사표가 될 줄 믿는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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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근 이사장이 작년 4월 충남 계룡대에서 열린 3군 본부합동아카데미에 초청돼 강연을 마친 뒤 3군 수뇌부와 기념촬영을 했다<사진 좌측부터 성일환 공군참모총장, 조용근 천안함재단 이사장, 최윤희 해군참모총장, 황인무 육군참모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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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에 들어가며-
세월이 참 빠른 것 같다. 지난 2004년 정든 국세청을 떠난 지 벌써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되돌아보면 별로 한 일 없이 그냥 세월만 흘려 보낸 것 같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지난 살아온 날들보다 훨씬 짧다는 것이다.
최근 세정신문사로부터 부담스러운(?) 원고 청탁을 받았다.
지극히 부족한 필자가 국세청 공무원으로 재직하면서 흘려 보냈던 사연들을 2만여명의 사랑하는 현직 후배들에게 들려주면 좋겠다 해서 원고 청탁을 하니 부디 거절치 말고 승낙해 달라는 요청이였다.
그러나 약 2달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거절 아닌 거절(?)을 했으나, 계속 끈질긴 요청이 있어 이제 더는 핑계댈 것이 없어 일단 승낙을 하게 됐다. 승낙을 해놓고 보니 몹시 신경이 쓰이게 됐다. 그렇지만 마음 한 켠에서는 이런 기회에 나의 지나온 40여년간 아니 어찌 보면 평생을 바쳐온 세금쟁이로서 9급 공무원에서 출발해 지방국세청장까지의 기나긴 여정을 솔직하게 진술해 보고 싶은 마음도 생겨나니 왠지 모르게 가슴 벅차기도 하다.
약관 20세 나이에 국세청 개청 요원으로 들어왔으니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사연들도 있었다. 지금 육십을 지나 칠십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 지나온 세월을 되돌아 보니 정말 기적 같은 순간순간들을 보냈다. 나는 이것을 하나님의 召命(Calling) 즉 그분께서 부르셔서 맡겨주신 사명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흔히들 직업을 천직(天職)이라고 했듯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즉 하a늘이 맡겨주신 직업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46년6월25일에 태어났으니 정확히 만 20세가 되어가는 66년6월20일에 국세청 9급 공무원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하게 돼 약 40년 가까이 본청을 비롯한 지방국세청과 일선 세무서를 돌아 다녔는데, 재직 중 군복무를 하게 돼 현역 입대기간 3년을 빼면 35년 이상을 세금쟁이로 근무해 왔다.
2004년 명예퇴임해 현직을 떠난 후에도 세무사회장 4년을 비롯해 지금까지도 세무법인의 대표로 현업에 종사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평생을 세금쟁이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 세상 물정 모르던 약관 20세에 공직에 입문했으니 지금 생각해보아도 웃음이 절로 난다. 오랜 세월 지나오는 그동안 몇번이나 어려운 고비를 거쳐서 무사히 명예퇴임이라는 목적지까지의 40년 세금 광야의 고된 삶을 되돌아 보고 그때그때 겪었던 사연들을 사랑하는 현직 후배들에게 들려줌으로써 이들의 성공적인 공직자 삶을 살아가는데 조금이나마 이정표로서의 도움이 됐으면 하는 것이 간절한 바람이기도 하다.
지난 2004년말 대전지방국세청장을 끝으로 정든 국세청을 떠나던 날, 모처럼 가족들끼리의 홀가분한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딸에게 남편으로서 또 아버지로써 그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한마디를 들려줬다.
“만약에 이 아빠가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그때도 국세청 공무원으로 일하고 싶다”고.
그때 함께 했던 아내를 비롯한 아들과 딸이 웃으면서 진심으로 나를 존경한다고 말해 줬으며, 또 그 날 명예퇴임식장에서 내가 흘리는 눈물을 보고 남편과 아빠의 진정한 모습을 보게 됐다고 나를 격려해 주기도 했다.
혹시나 독자 여러분께서 이러한 필자의 우매한 표현(?)에 대해 괜한 오해를 말아 주셨으면 한다.
그만큼 국세청 최말단 9급에서 출발해 나의 청춘과 평생을 바친데 대한 각별한 애정을 표현했으니 너그럽게 봐주셨으면 한다.
지금부터 내가 겪었던 이야기들은 어떤 언론이나 책에서 나오는 성공시대의 감동적인 성공스토리가 아니라 9급에서 출발하여 8급, 7급 등을 거쳐 한단계, 한단계 올라가면서 그때마다 내가 겪었던 조마조마했던 순간들을 솔직하게 들려주고 싶다.
참고로 필자는 겉보기와는 달리 내면적으로는 누구 못지 않게 매우 소심한 성격을 지니고 있어 세상사람들의 이목들에 지나칠 정도로 민감해 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동안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너무도 많은 심적 고통을 주었다고 생각하니 이 자리를 빌어 먼저 용서를 구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왜 현직에 있을때 나는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지 못했던가?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휴가도 즐기고, 맛있는 식당에 가서 함께 식사도 하지 못하고 늘 이웃을 의식하고 살아 왔는지….
<계속>-매주 水·金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