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무상복지론으로 촉발된 복지논쟁이 뜨겁다. 보편적 복지 확대와 재원확보 방안, 부자감세 논란, 누진세 강화, 부유세 신설 등 논란의 대상도 매우 다양하다. 무상복지론은 여야를 막론하고 각기 내부적으로도 일치된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혼선과 마찰을 빚고 있어 국민된 입장에서 혼란스럽다.
무상복지론을 비롯해 최근 정치권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는 복지논쟁은 경제적 합리성이나 재정여건, 국민경제의 발전단계 및 성숙도, 초과부담 없이 복지제도를 이끌고 갈 수 있는 사회·경제적 인프라 구축 여부, 정직에 기반을 둔 국민의식의 성숙도, 재원소요 발생시 부담능력 등에 대한 객관적 입장과 전망에 대한 것보다는, 정치적 관점이나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적 입장, 선거에서의 득표 가능성 등에 치우쳐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다른 중요한 것들은 차치하고 오직 복지론만으로 논쟁이 되고 있는 듯해 안타깝다.
문제의 핵심을 냉정하게 살펴본다면 작금의 복지논쟁이 정치적 포퓰리즘의 산물로서 자칫 미래에 경제적 재앙을 가져다 줄 가능성이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특히 다수결의 원칙으로 정치적으로 정책을 밀어 붙인다면 그럴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왜냐하면 수혜자의 범위가 과반을 차지하는 반면 재원을 부담하는 계층이 극소수인 경우라면 정책의 타당성·정당성을 논하기 전에 이미 정치적으로 잘못된 결론을 반복적으로 되풀이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다수결의 원칙이 민주주의의 핵심임은 분명하지만,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결정된 사안이 반드시 최선의 결과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국민들 사이에서는 은연 중 서민^보호받아야 할 계층, 고소득층^탈세집단 또는 증세의 대상이라는 이분법적인 등식이 무의식의 기저를 형성하고 있다. 사회적 통합 또는 인간적인 삶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최저수준의 생활을 보장해 줄 목적으로 약자에게 경제적 보탬을 지원해 주자는 원칙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방법과 규모 등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하다.
당위적으로는 곤란을 느끼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생활수준을 보장해 주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문제는 자원이 희소하다는 점이다. 달리 표현하면 욕망은 넘치지만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능력이 모자란다는 점이다. 자식을 결혼시키는 부모의 입장에서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각자 능력에 맞춰 규모 있게 보태주는 것이 미덕이다. 복지도 마찬가지다.
복지문제의 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원칙의 정립과 국민적 합의 및 상대방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이 필요하다. 원칙이란 필요와 능력을 적절히 저울질해 우리 수준에 걸맞는 복지의 범위를 정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복지를 통한 순혜택이 있다고 해 무한정 복지를 확대하는 것은 곤란하다. 복지에도 비용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즉, 혜택이 비용보다 훨씬 더 커야만 해당 복지제도를 지속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국민적 합의란 다수결의 원칙을 존중하되 자칫 포퓰리즘에 기반해 소수를 대상으로 한 다수의 횡포가 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생활이 어려운 저소득 빈곤층에 대한 사랑의 손길이 필요함은 두 말이 필요없다. 동시에 고소득층에 대한 사랑과 감사도 절실하다. 그런데 이 가운데 후자에 대해 강조하는 경우를 보기 어렵다. 고소득층은 복지재원을 마련해 줘야 하는 의무자로서만 존재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다. 고소득층도 우리의 이웃이자 우리 국민들 중 일부이다. 일부 고액탈세자로 인해 고소득층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강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일부 탈세자 존재가 대다수 고소득층을 비난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들 대부분은 역시 성실·근면한 우리의 일부로서 우리가 함께 보듬고 사랑해 줘야 할 우리 자신들이기 때문이다.
조세수입의 거의 대부분을 고소득층이 사실상 전담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그들의 기여가 없다면 복지논쟁 자체가 의미가 없어진다. 작금의 복지논쟁에서 아쉬운 것은 정작 복지재원을 부담해야 하는 계층들에 대한 의견 수렴과 적정성 여부에 대한 논의가 없다는 점이다. 복지제도의 확충을 위한 논의를 개시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치적 논의가 선행돼야 한다. 그렇지만 지속 가능한 복지제도로서 성공적으로 정착되기 위해서는 경제적 합리성과 부담능력에 대한 검증이 우선돼야 한다.
최근의 무상복지 논쟁은 이와 같은 가장 기본적인 사항에 대한 논쟁이 실종된 채 정치논리와 이념적 대립으로 점철되고 있다. 지금이라도 여야 모두 각자의 정치적 입장을 떠나 수혜자 모두를 아우를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우리나라 최고소득층의 세부담 수준은 이미 왠만한 선진국 수준을 넘고 있다. 이들에 대한 소득세 과세의 강화와 부유세 도입 논쟁은 정치적 파괴력이 높다. 반면에 그로 인한 근로의욕 및 자본축적 저해 효과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인지 알면서도 외면하는 것인지 언급이 없다. 응능부담 및 재분배의 측면에서 고소득층이 세부담을 많이 담당해야 함은 굳이 재정학 이론을 거론하지 않아도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은 노력없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아니다. 그들은 소득 창출을 위해 피나는 노력과 각고의 시간을 인내한 사람들이다. 누구든지 지혜롭고 부지런히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 돼야 한다. 복지제도의 지속가능성 문제뿐만 아니라 선순환 구조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당장의 유익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장단기적인 비용과 편익을 모두 철저히 따지고 비교형량해 보면서 상호 존중해 주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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