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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하기 2024.06.14. (금)

거대담론과 조세정책

김유찬 <홍익대 교수>

보수적 입장을 견지하는 주류 경제학자들은 가담하지 않은 상태에서 진보학자들 사이의 거대담론이 인터넷 신문을 중심으로 지속되고 있다. 장하준·정승일 같은 이론가들은 정태인·이병천 같은 연구자들의 재벌개혁론에 대해 주주자본주의 혹은 금융자본주의를 심화시키는 방향이라고 비판하고 있고 자본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이 흥미로운 논의에 몇줄만 추가하고자 한다.

 

두 그룹의 의견이 사실상 닮았다는 제3자적 입장을 견지하는 이도 있으나 사실상 첨예한 의견 대립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 발전에 대한 평가에서, 재벌과 외국자본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그리고 미래에 대한 정책 대안의 제시에서.          

 

장하준·정승일은 박정희식 경제체제를 반노동·친성장의 국가적 자본통제로 규정하고 있다. 박정희는 자본이 극단적으로 부족한 개발 초기단계의 경제에서 사회주의 국가들처럼 외국 자본을 혐오하지 않았고, 남미국가들처럼 외국 자본을 숭배하며 무차별적 자유와 권리를 허용해 외국 자본의 국제생산체계에 한국을 종속시키도록 방기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외국 자본과 함께 어렵게 형성된 국내 자본을 국가적으로 통제하면서 발전단계에 적절한 생산적 투자와 기술 개발, 일자리 창출에 성공적으로 투입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자본에 대한 국가적 통제는 그러나 군사정부들에 뒤를 이은 문민정부들에서 해체됐고 이 과정에서 진보적 학자들은 자본에 대한 국가통제의 해체를 경제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적극 동조했으며 이후 한국경제는 크고 작은 금융위기를 경험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박정희 체제의 근로자 탄압과 반민주주의적 행태를 인정하더라도 그 경제적 성과는 긍정적으로 유지·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에 대한 평가가 그렇게 단순할 수는 없다. 독재정권의 희생자들의 직접적 피해에 더해 아직까지도 사회 곳곳에 잔재하는 폭력적·전제적 질서와 사고방식이 야기하는 사회적 문제를 일단 접어두고 경제발전 측면에서 국한해 보더라도 그 시대가 남긴 후유증으로 우리가 지불할 비용은 아직도 많다. 이 비용이 얼마나 될지 아직 아무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

 

자생적·민주주의적 경제발전방식을 지양하고 전제적·명령적 방식의 개발 독재로 성장을 이룬 것은 후일에 있을 성장의 과실을 미리 앞당겨 수확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긴 장기적 시각에서 보면 성장률은 개발 독재로 인해 낮아진 것으로 평가될 수도 있다. 초기의 성장률은 높을 수 있으나 자생적·민주주의적 경제체제로의 전환과정에서 역작용이 나타나 전체적인 기간에 대한 성장률은 오히려 더 낮아질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개발 독재로 인해 경제 발전의 수확은 일부 계층에 부당하게 집중될 수밖에   없으며 결과적으로 급격하게 계층사회로 발전하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부동산을 포함한 부와 소득의 심각한 격차는 개발독재 시기에 그 뿌리가 있다는 점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심각한 계층적 격차와 이로 인한 사회적 비용도 또한 성장을 미리 앞당긴 것에 대한 비용이다. 문제는 미래에도 우리 사회는 엄청난 비용을 계속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가 급등, 부의 불균등한 분배로 인해 사회적 취약계층의 생계문제, 건강, 노후 및 교육문제 등에 대한 비용은 그렇지 않았을 경우에 비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비용은 물론 GDP 성장률 같은 공식적 경제통계에서 읽기 어렵다. 그러나 OECD 국가들에서 가장 높은 자살율을 가진 나라가 현재의 대한민국이며 이러한 지표에서 우리가 치루고 있는 비용은  바로 읽혀진다.  

 

장하준·정승일은 주주자본주의적 관점에서 추구되는 재벌 개혁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재벌 개혁은 결과적으로 국내 기업을 재벌에게서 해체해 외국 자본에게 넘겨주는 결과가 되니 어리석다는 지적이다. 외국 자본에게 국내 기업의 지분 보유를 광범위하게 개방한 IMF 위기 이후 국내 기업의 지배구조와 경영행태가 개선되기보다는 소위 '먹튀자본'에게 당하는 결과만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이 지적은 타당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재벌과의 사회적 대타협 같은 현실에 존재하는 제도적·정책적 수단과 어떠한 관계로 만나는지 애매한 내용의 제안이 현실적 상황의 타개책으로서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도 또한 인정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미래에 대한 비전이며 제시하는 구체적 정책 및 제도적 개혁안의 현실 적합성이다. 장하준·정승일의 메세지에서 가장 중요하고 호응을 받는 내용은 자본에 대한 통제가 필요하다는 점일 것이다. 문제는 박정희 시대의 경제적 성과를 긍정하면서 자본적 통제를 주장한 탓에 글을 읽는 사람들은 미래에 추구할 자본적 통제의 모습을 박정희류의 전제적 성격과 이와 연계된 관치경제의 이미지와 연관시키게 된다는 점이다.

 

장하준·정승일의 의도가 어떤지 잘 모르지만 군사정부의 파워를 배경으로 하고 실행되는 박정희식의 전제적 자본 통제는 미래의 선택대안으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민주적 정치체계에서는 일정한 제도적 틀 내에서 기업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보장할 수밖에 없다. 이 일정한 제도적 틀을 규정하는 과정에서 국회의 입법활동이 역할을 수행하고 이를 통해 자본에 대한 통제가 이뤄지는 경제적 체제가 우리가 선택할 유일한 대안이다.

 

사실 자본은 이러한 민주주의적 제도 내에서 통제가 매우 어려운 속성을 갖는 것이다. 더욱이 자본시장이 이미 매우 광범위하게 개방됐고 역방향으로의 회귀가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러한 국제적 현실은 정책당국자들이나 의식있는 학자들을 자주 낙담케 한다. 그러나 그래도 다른 대안이 없다. 마치 국회에서 일어나는 비효율적이고 지극히 당파적인 분란을 보면서도 국회를 없애자고 할 수 없는 것처럼.

 

그리고 민주적 자본 통제라고 개념에서 볼 때 사실 경제정책에서 논의되고 있는 거의 모두가 자본적 통제에 대한 것이다. 공정거래법·상법상의 규제, 근로기준법상의 규제, 사회보장법, 세법상의 기업에 대한 세금 부과 등이 모두 그러하다. 때문에 자본적 통제가 중요하다는 주장보다는 사실 어떻게 자본적 통제를 해야 하는가에 대해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현실에 실제적으로 기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체적 대안들을 장하준 등은 별로 제시한 바가 없다.      

 

어떻게 자본에 대한 적절한 통제의 제도적 틀을 마련할 것인가는 우리 사회가 앞으로 오랫동안 싸우고 협조하며 도출해 내야 할 가장 중요한 국가적 의제(National Agenda)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리고 훌륭한 자본적 통제수단 중의 하나인 조세정책은 기업에게 다른 시민 모두에게 요구하는 원칙인 응능과세원칙에 부합되도록 세금을 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기업은 영리활동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제하고 남은 잔여소득(Residual Income)을 기준으로 과세소득을 부담하며 재정학에서는 잔여소득에 대한 과세는 기업의 중요한 의사결정 종료 후에 이미 이뤄진 경제적 성과에 대한 과세이므로 기본적으로 기업의 투자 활동을 위축시키지도 않는다고 보고 있다. 

 

개발시대 이후 우리나라 기업은 정부의 일방적 사랑(저금리자금 배급, 환율 통제, 세제 지원)을 통해 크게 성장했고 아직도 정부의 환율 및 조세정책에 크게 기대어 성장하고 있다. 우리 기업이 현재 세계시장에서 승승장구하는 것이 온전하게 우리 기업이 상품 경쟁력에 매진한 탓이고 외국 유수기업은 이보다 못하기 때문이라고 본다면 매우 나이브한 것이다. 신중한 학자들은 우리 기업의 국제시장에서의 성공이 유리하게 저평가된 환율에 기인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환율정책을 통해 국가 내에서 경제성과에 대한 분배는 크게 왜곡되고 그 그늘에 내수 중소기업과 서민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렇게 설정된 환율이 국가 전체에 이롭기에 그대로 유지한다 하더라도 국내적으로 재정과 세제를 통한 분배적 보완은 서민과 중소기업에게 유리하게 이뤄져야 한다. 이러한 보정이 없이 장기적인 분배의 왜곡을 방기하는 것은 국가의 직무유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법인세율 22%와 소득세 최고세율 38%의 격차는 매우 큰 것이기에 기업을 지배하는 대주주는 법인세를 부담하고 남은 이익을 지속적으로 기업에 유보시켜서 세부담을 줄일 수 있다. 결과적으로 기업의 대주주들은 다른 시민들에 비해 가볍게 과세되고 세부담의 수직적 공평성은 심하게 훼손된다. 소득세 최고세율과 법인세율의 격차를 10% 이내로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 기업은 성공적인 로비를 통해 이 문제가 사회적 의제로 떠오르는 것을 아직까지는 성공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본면의 외부기고는 本紙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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