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세당국 얘기대로라면 단지 ‘사업용 계좌’라는 5글자를 표기 받으러 은행을 방문하는 꼴밖에 안 된다.(은행 관계자)”
“K은행 창구에 가서 기존에 쓰고 있던 계좌를 사업용 계좌로 대체하려고 했더니 신규로 계좌를 개설해야만 한다고 했다.(L某 세무사)”
“국세청은 ‘세금문제에 신경쓰지 않고 사업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해놓고선 사사건건 간섭만 한다”며 “개인사업자들의 정확한 소득파악을 위한 제도 중의 하나로 이해하지만, 특정한 수입과 지출에 대해 별도의 계좌를 만들라고 하는 것은 행정편의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다.(사업자)”
정부가 금융거래와 실물거래의 상호연계로 세원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마련한 ‘사업용계좌 제도’가 계좌개설대상 사업자들로부터 “또다른 세무간섭이다. 영업권 침해 아니냐?”는 비판을 받고 있다.
게다가 계좌개설대상자들은 사업용계좌를 개설·신고하려해도 절차상의 문제점(어려움) 때문에 혼란을 겪고 있었으며, 은행 등 금융기관은 그들 나름대로 전산시스템상 문제와 대출 등 금융거래상의 문제점을 들며 어려움을 호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특히 일부 계좌개설대상자들은 “국가가 특정 통장을 만들라는 것도 기분 나쁜데, 금융기관들은 새로 계좌를 만들어야만 한다고 횡포를 부린다”고까지 지적했다.
개인사업자들의 금융거래를 명확히 해 세원투명성을 확보하려던 제도시행이 시작도 하기 전에 암초에 걸린 꼴이 됐다.
서울 영등포 L某 세무사는 지난 9일 “며칠전 인근 K은행 지점을 방문해 기존에 쓰고 있던 계좌를 사업용계좌로 대체하려고 했는데, 기존 계좌를 사업용으로 쓸 수는 없고 새로운 계좌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거래처 2~3곳의 사업용계좌를 대신 만들려 했는데 마찬가지였다”면서 “세무서가 보내온 자료에는 분명 기존계좌도 사업용계좌로 쓸 수 있도록 돼 있는데, 이것은 은행들이 횡포를 부리는 것 아니냐”고 따졌다.
그러나 해당 K은행 본점 관계자는 “우리 은행에서는 기존계좌를 사업용계좌로 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일부 은행이 기존계좌를 사업용계좌로 처리하는데 따른 전산처리가 불가능해 신규 개설만 요구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같은 사실을 부인했다.
L某 세무사는 “사업자나 세무대리인이나 지금까지 길게는 수십년 동안 사용해 온 통장을 새로 바꾸기가 쉽지 않다”며 “통장을 새로 바꾸려면 인터넷 뱅킹, 폰 뱅킹, 신용카드 연계 등 변경해야 할 사항이 너무 많은데 금융기관과 과세당국은 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 같다”고 지적했다.
한 음식업자도 “某은행에 가서 기존에 쓰고 있던 저축예금 통장을 사업용 계좌로 개설하려고 했는데, 보통예금 통장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고 해서 하는 수 없이 신규로 개설했다”고 전했다.
현행 법규에서는 사업용계좌를 개설 신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금융기관의 ‘사업용 계좌’표기가 있어야 하는데, 계좌개설과정에서 이와 관련한 불편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일부 사업자들 사이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업자가 어떤 통장을 쓰던 무슨 상관이냐? 세금만 제대로 내면 되는 것 아니냐? 정 의심스러우면 세무조사 해 밝히면 될 것 아니냐?”는 격한 분위기마저 감지되고 있다.
금융기관들도 ‘사업용 계좌’ 때문에 골머리를 썩기는 마찬가지였다. 한 은행 관계자는 “신규 개설은 문제가 아닌데 기존 계좌를 사업용계좌로 개설하려면 평균 40분 가량이 소요돼 다른 민원인 대기시간이 너무 길어진다”고 하소연했다.
이 관계자는 “계좌를 개설한다고 해서 당장 은행에게 큰 이익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은행은 고객을 확보하게 되면 고객정보를 전산에 입력한 후 지속적으로 관리해 나가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사업용계좌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전산을 일부러 ‘에러(error)’내 처리해야 하는 상황도 벌어진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또 “개인통장을 사용하던 개인사업자의 사업용계좌를 신규로 만들고 사업자등록 등 정보를 은행 전산망에 입력하거나, 기존 계좌를 사업용계좌로 변경하기 위해 사업자등록 등 관련 사업자정보를 전산망에서 변경하는 경우 고객분류가 ‘개인고객’에서 ‘소호(기업)고객’으로 바뀌어 대출 등 금융거래에서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탓에 일부 은행에서는 기존 계좌를 사업용계좌로 대체하려는 사업자들에게 (사업자 정보를 전산망이 입력하지 않고) 창구 여직원이 수기(手記)로 ‘사업용 계좌’ 문구를 표기해 주는 경우도 허다한 것으로 나타났다. 재경부 지침에 따르면 ‘사업용 계좌’라는 문구표기는 고무인이나 수기 모두 가능하도록 돼 있다.
이러자 몇몇 은행 관계자들은 “그러면 뭣하러 금융기관에서 표기를 받으라고 하느냐. 계좌개설대상자 자신이 직접 특정계좌를 ‘사업용’이라고 표기해 세무서에 신고하면 되는 것 아니냐”면서 “결국 사업용계좌를 개설 신고하는데 금융기관을 반드시 거치도록 한 것은 개인사업자들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하기 위한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결국 과세당국이 필요에 따라 사업용계좌를 통해 개인사업자의 사업과 관련한 금융거래내역을 확인하고, 이를 세금계산서합계표 등 실물자료와 대조해 보기 위해 반드시 금융기관을 거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재경부 세제실 관계자는 “향후 실물거래와 금융거래를 통합하기 위해서는 금융기관 전산망상에서 관리가 돼야 하고, 이를 사업자들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고 했고, 국세청 소득세과 관계자는 “특정의 계좌가 사업용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도록 사업자들에게 공신력을 주기 위한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한 은행 관계자는 “사업용계좌 개설 및 신고와 관련한 제한규정을 따로 두지 말고, 사업자들이 ‘사업용 계좌’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안점을 두고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사업자도 “사업용계좌를 통해야만 하는 거래대상이 수없이 많을 텐데 불가피하게 사업용계좌를 거치지 못한데 따른 대책도 세워둬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가운데 일부 계좌개설대상자들은 “사업과 관련한 자금흐름이 정밀하게 노출된다”는 부담감 때문에 계좌개설신고를 미루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사업용계좌 미개설, 미사용에 따른 가산세가 내년부터 적용된다는 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몇몇 지방청은 지난달 일선세무서 소득주무들을 소집해 신고실적 제고회의를 개최하고, 미신고·개설자에 대한 독려작업을 벌여왔다.
또 지방청 차원에서 세무사·의사·변호사 등 전문직사업자 단체에 협조요청 전화나 공문을 발송했고, 일선세무서도 간담회나 공문 발송을 통해 계좌개설 및 신고를 지속적으로 독려하고 있다.
국세청은 6월말까지의 각 금융기관별 계좌개설신고 실적을 통보받았으며, 이 자료를 토대로 미개설 사업자에 대해서는 세무서별로 독려작업을 펼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