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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하기 2024.04.16. (화)

이전호 세무사의 '단풍 세금'…세금계산서와 시의 경계 허물기

숫자와 시는 거리가 먼 것 같지만 둘 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일부라는 점은 매한가지다. 이전호 세무사가 최근 출간한 시집 ‘단풍 세금’을 보면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대차대조표, 세금계산서, 카드 전표, 현금영수증, 소득, 재산, 인적 네트워크, 자산, 종합부동산세, 투자, 전세금, 대출 규제, 탈루, 순이익, 차변과 대변, 스카이 캐슬, 마이너스 통장, 이력서, 특허권, 페이퍼 컴퍼니.’

 

‘봄 햇살, 그윽한 숲속, 파꽃, 노을 술, 여름 바다, 비바람, 아카시아꽃 향기, 맑은 개울물, 은빛 물결, 상수리나무, 산허리 칡넝쿨, 꽃잠 자던 산새, 가을 실바람, 해거름 하굣길, 겨울 얼음장 밑 붕어.’

 

이처럼 이질적인 시어들이 이 세무사의 시집 속에서는 아주 가까이 만난다. ‘구름 증여’, ‘가을 대차대조표’ 같은 식이다. 세금을 잘 아는 그는 상식의 경계를 뛰어넘어 자유자재로 시어를 조탁한다. 세무사이자 시인인 저자가 ‘직업어로 시를 쓰겠다’고 다짐한 결과다.

 

표제시인 ‘단풍 세금’에서는 단풍잎이 ‘찬란한 초록 세금계산서’, ‘빨간 세금계산서’로 변신한다. 세무사가 늘 다루는 전표를 나뭇잎에 빗댔다. 탈루의 기미가 보이는 가을을 지나, 빈 잔고 추위를 견디면 이듬해 ‘연둣빛 세금계산서’가 나오는 것으로 그렸다.

 

조세 소송을 연상케 하는 ‘세송(稅松)’은 다름아닌 ‘세금 내는 소나무’다. 예천 땅의 석송령이 장학금을 주고, 양심 저울추에서 흔들리던 세심(稅心, 납세자의 마음)도 눈 녹듯 사라지게 한단다. 짧은 시 속에 푸른 소나무와 조세 문화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시인은 세금 포탈범은 멧돼지로, 건물주를 뻐꾸기로 부르면서 독자에게 읽는 즐거움을 준다.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는 까치와 병아리, 분식회계 하는 딱따구리(’뜬구름‘ 中)와 북두칠성 자본가들(’낚싯바늘‘ 中)이 함께 퍼덕이는 세계다.

 

시집의 구성은 팔공산 솔모퉁이를 돌던 시인의 어린 시절(1장 아버지의 돋보기)로 시작해 마추픽추(2장)로 이어진다. 이 장에는 남미, 시베리아, 스리랑카, 구인사, 봉정암 등 국내외 여행지를 다녀와 쓴 시들이 모여 있다. 이어 단풍 세금(3장)-전표 인생(4장) 순서다. 골프장에서 쓴 시 ‘피칭 샷’에 다다르면 종횡무진 펼쳐지는 소재의 역동성에 감탄하게 된다.

 

그는 어떻게 시를 쓰게 되었을까? 17년간의 국세청 근무 후 지난 1998년 개업해 세무사로 활동해 온 이전호 세무사는 중년을 지나 시를 공부하면서 세금과 관련된 시를 쓰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됐다. 국제문예 신인상(2013년)으로 등단했고, 이번 시집이 첫 출간작이다.

 

이 세무사는 머리말을 통해 “세무사가 되어 시를 만난 이후 제게 봄꽃은 아름다운 납세자로 보였다. 초록 숲은 조세 평등처럼 무성했고, 붉은 단풍은 세금을 내는 은유로 포착됐다”며 “문득 지난 겨울 흰 눈이 제 인생의 재무제표에서 순이익처럼 고맙다”고 말했다. 시와 연결지어 보면, ‘내 삶의 재무제표는/별빛 둥지 국세청을 지나/지금, 숫자들만 아련하다(‘출력’ 中)’는 회포일까.

 

책 해설을 쓴 김동원 평론가는 “수록된 시편마다 ‘상상력과 기발한 시선(視線)’의 새로움이 놀라운 서정을 함의하고 있다”며 “특히 세무를 은유한 시편들은 현대시의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해도 좋을 만큼 깊고 놀랍다”고 평했다.

 

앞으로 가로수를 볼 때면, ‘나무는 전표를 끊으며 살아간다(전표 인생1)’는 그의 싯구가 겹쳐질 것 같다. ‘독야청청 배고픈 시인’의 편견을 깨트리는 시어들. 이 세무사의 시를 읽다보면 삶 속에서 돈을 버는 일과 시를 읊는 일이 별개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가을날, 중고서점에서 시집 한권 품고 돌아왔으나 문득 ‘이번 달 대출 이자 내라는/휴대폰 벨소리(‘코로나19’ 中)’에 허탈해 본 사람이라면 확실히 공감할 것.

 

[프로필]이전호 세무사

△경북 의성 △국세청 근무(17년) △세무사 개업(1998년) △한국세무사회 윤리위원 △대구지방세무사회 부회장 △국제문예 신인상(2013년) △한국문인협회·대구문인협회·경북문인협회 회원 △텃밭시학 동인 △군위문인협회 부회장(現) △이전호 세무회계사무소 세무사(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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