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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하기 2025.06.18. (수)

내국세

[爐邊野談]국회서 밀고들어오는 바람에 종로에서…


국회서 밀고들어오는 바람에 종로에서 의정부로 좌천
고려원양사건 터져 종로署 '쑥대밭' 인간사'새옹지마'


 

달리는 버스 차창밖으로 펼쳐지는 도봉산 자락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눈물이 핑 돈다. '세계적인 명산'이라는 수식어로 치장된 저 인수봉의 아름다운 자태도 오늘만큼은 너무나 무심해 보인다.
"내가 왜 이렇게 돼야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섭섭하고 억울한 생각에 마음이 안 가라앉는다. 공직사회의 냉엄한 인사발령에 대해 이렇다저렇다 불평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그래도 전국 1번지 세무서, 그것도 조사과장이라는 멋진 보직에서 하루아침에 아무런 이유없이 시골 세무서로 발령난 것에 대해 울화통이 치민다.

부가가치세제 도입을 1년 앞둔 '76년 봄. 종로세무서 조사과장 A씨가 갑자기 영문도 모른채 의정부세무서로 발령을 받고 부임지를 향해 가던 중 도봉산이 보이자 울컥 설움이 복받친 것이다. 종로3가에서 의정부로 가는 시외버스를 탄 그는 버스가 서울을 벗어나 의정부로 향하자 마치 '유배'를 떠나는 기분을 느낀 것이다. 그러나 직상사인 종로세무서장이 일러준 '앞날이 창창한 사람이니 이 정도는 감수할 줄 알아야지'를 새기며 꾹꾹 눌러 마음을 달랬다.

그러나 A씨의 그 '억울한 유배'가 인간지사 '새옹지마', '전화위복'을 잉태하고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A씨가 종로세무서에서 의정부세무서로 갑자기 발령나게 된 배경은 부처간 '정책인사' 때문. 재무부 사무관 인사과정에서 국회파견인사 등이 얽히면서 국회의 한 고참사무관이 국세청으로 들어와야 할 형편이었고, 국세청은 그를 종로세무서로 발령했다. 국회의 체면을 살려야 했기 때문에 '1번지 세무서'를 배려한 것. 결과적으로 A씨는 아무런 죄없이 하루 아침에 희생양이 된 것이다.

의정부세무서에서 근무한지 두달쯤 됐을 무렵. 서장이 A씨를 급하게 찾았다. 서장실로 들어서는 A씨를 향해 서장은 "당신 몰라? 종로세무서가 지금 쑥대밭이 됐대"고 말을 건냈다. 서장은 이어 "당신 참말로 운좋아. 다 잡혀갔다는구먼"하고 말했다. 서장은 A씨를 자리에 앉히면서 자초지종을 들려줬다.

검찰이 고려원양(주)에 대한 기업비리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종로세무서 직원 다수가 검찰에 연행됐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조사과는 과장을 비롯해서 계장, 차석, 직원까지 거의 모두가 잡혀갔으며, 검찰의 수사 강도로 볼때 모두가 무사하지 못할 것 같다는 게 서장의 전언이었다. A씨는 아찔했다. 두달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과장으로 있던 곳에 벼락이 떨어졌으니 그 심정이 어떻했을지는 말 안해도 알만한 일.

그런데 하늘은 또 한번 A씨를 구했다. 검찰은 직원들을 하나하나 역피라미드 형식으로 조사해 올라갔는데 이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긴 것이다. 연행돼 온 직원들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검찰이 쓰라는 조서 하나도 제대로 쓰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조사는 지연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결국 '천우신조'와 같은 행운을 불러왔다.

"이××, 멍청하긴. 빨리 쓰란 말야."

마무리 조서를 받던 검찰 수사관이 계장이 조서를 잘못 쓰고 꾸물거리자 완력과 쌍소리를 해가며 다그친 것이다. 그러자 계장은 내용을 더 쓸 겨를도 없이 사실상 서두만 꺼낸 조서를 수사관에게 그냥 줘버렸다. 훗날 알려진 사실이지만 계장이 조서를 못쓰고 시간을 지체했던 것은 진술 내용을 적는 공간이 좁아 내용을 어떻게 함축해서 쓸까를 궁리하다 보니 시간도 지연되고 알맹이도 빠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참말로 말도 안되는 이유가 수사의 강도를 '솜방망이'로 바꿔놓은 것이다. 조서상의 좁은 공간은 '별첨'을 붙여 다른 용지에 쓰면 되는 것인데 계장은 그것을 몰랐던 것이고, 결국 그 '무식'이 행운을 가져온 것이다.

이 사건으로 당시 종로서장은 춘천으로, 조사과장은 창원서로 좌천되고 계장은 파면, 직원은 구속됐다. 서장과 과장은 얼마뒤 이민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행운의 사나이' A씨는 지방청장 등 국세청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국세행정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지금도 여러 방면에서 왕성히 활동하고 있다.

<서채규 本紙편집주간>
seo@tax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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