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한국일보
10/06(수) 18:04
굵직한 탈세사건들이 연일 톱뉴스로 등장하고 있다. 결코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70년대 초반에 있었던 삼학소주 탈세사건이나 호남전기 탈세사건도 그 당시에는 대서특필되었으며 그들 기업은 처벌의 여파로 문을 닫기까지 하였다.
그렇지만 현재 문제되고 있는 보광, 삼성, 한진, 통일그룹 등 거대기업 내지 재벌들의 경우에는 비록 그 규모가 엄청나다 할지라도 문을 닫는 일은 없으리라 예상된다. 그 정도로 허약하거나 대비가 소홀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요즈음 터진 탈세사건이 세간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이유는 「대규모기업집단」이라 불리는 재벌들이 자행한 부의 축적을 위한 지나친 행위가 국민의 분노를 사기에 부족함이 없는 탓이다.
그러면 왜 재벌기업의 탈세가 지금 문제되는 것인가? 과거에는 정경유착이라는 장막에 가리워져 있어 오랜동안 전면에 떠오르지 않았지만 「검은 유착관계」의 사슬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현정부가 털어서 먼지가 너무 많이 날 재벌기업들에게 과감히 수술칼을 들이댄 데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지금까지 별탈없이 지나왔던 경험의 연속이 타성으로 이어져 탈세문제에 관하여 일종의 「안전불감증」이 배태되었다고 하는 진단이 가능하다.
박정희정권 때 어느 재벌기업은 기업공개촉진법에 의한 기업공개명령을 거부하고 집권당에 매월 몇 억원씩 비밀헌금을 하면서 정경유착을 자행하였다 하고, 전두환정권 당시에 모 재벌기업은 사전적인 정치자금 제공을 기화로 한국산업은행터 일대를 헐값으로 불하받았다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노태우정권은 수천 억원의 비자금을 재벌기업들로부터 거둬들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비리를 둘러싸고서 탈세와 정경유착이 물고물리는 유착관계가 이루어졌으리라는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영삼정권 때에 와서는 한보사건과 같은 탈세와 직결되는 큰 사건들이 발생한 바도 있다.
이렇듯 재벌기업들은 노련한 로비활동으로 정치적 비호를 보장받아 탈세조사
로부터 자못 안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이 조성된 이면에는 조세제도의 맹점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놓칠 수 없다. 70년대까지는 각 세무서별이나 과별로 세수목표액을 설정하여 독려하는 이른바 배세제도라는 것이 있었다. 그러한 세무목표 배정액을 채우기 위하여 일선 세무서장들은 그야말로 사활을 건 독려책을 구사하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기업 총수들이 사망할 때에 내는 상속세와 생전증여에 따라 내는 증여세는 배세와 무관하게 운용된 결과 이들 세금은 바보나 낸다는 의미의 「바보세」라는 비아냥이 일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80년대에 들어 경제사정의 호조로 세수목표의 달성이 쉬워지자 배세제도는 없어졌다. 그런 가운데 세무당국은 전문성을 높이고 연구하는 진지한 자세를 갖추지 않고 안이한 과세행정만을 펼치는 습성이 고질화하고 말았다.
게다가 세계잉여금이라는 것이 생기는 초과징수를 나무라는 국회의 무지가 탈세를 발본색원하려는 의지를 꺾기도 하였다. 정확한 세수추계를 바탕으로 세율을 내릴 수 있는데도, 법을 잘못 만들어 놓고서 법대로 세금을 많이 징수하는 이른바 법치세정의 결과를 두고 부당한 과다징수라고 질타하는 국회의원도 있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기업구조조정 등 산적한 현안문제를 풀기 위하여 공적 자금을 쏟아부어야 할 필요성이 있는 한 정부로서는 세수증대를 위한 갖가지 방책을 강구할 도리 밖에 없다고 본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직접요인은 최근에 단행된 기능 위주의 국세행정 조직개편으로 조사인력이 배로 늘었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IMF사태의 여파로 소득감소 또는 결손을 본 기업들이 채우지 못하는 부분을 메꾸는 대책의 하나로서도 탈세조사는 의미있는 일이 될 수 있다. 다만 「미운 털이 박힌」 기업만을 골라서 공략하는 「표적수사」라는 평을 듣게 되는 것만은 진정으로 경계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