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상 - 내 마음의 고향

2000.04.24 00:00:00

-역삼세무서 전산실 윤소영


서울역에서 순천행 밤기차를 탔다.

새벽 세시 삼십분쯤이면 순천일것이고, 택시를 잡아 벌교 지나서 뱀골재만 넘으면 집에 도착할 것이다.
새벽녘…….
여느 때보다 다급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만으로도 심상찮은 일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고 그 짧은 순간에 “어떤 그 무엇에도 강해지자”는 다짐과 동시에 엄마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난 그 울음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잘 알았다. 엄마가 황망하니 아무말 하지 않았었더라도…….
근 십년동안 거동이 불편하신 할머니를 모시며 머리 하얗게 같이 늙어가는 엄마의 모습이 측은해서 가끔씩 할머니한테 매몰찬 소리도 했었던 나.

그런 나를 누구보다 더 귀여워하고 사랑해 주셨던 우리 할머니가 이젠 우리곁을 영영 떠나
신 것이다.
밖은 온통 깜깜한데 차창에는 시들고 축 늘어진, 생기있는 데라곤 한 구석도 찾아볼 수 없는 낯익은 여자의 얼굴만이 흔들흔들거렸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촌놈이 서울생활한 지도 어언 십일년이 되어 간다.

대학 사년동안과 일년간의 일반 회사생활, 그리고 다가오는 오월 팔일이면 딱 오년째가 되는 공무원 생활이 바로 나의 서울생활 전부다.
그동안 대학동창이랑 결혼도 했고, 두 아이의 엄마도 되었다.

우리 할머니가 그랬고 우리 엄마도 그랬으며 또한 내 딸도 그래야 할 출산의 고통을 느끼면서 소중한 생명의 신비로움 앞에 그저 경건한 눈물밖에 나오지 않았었다.

할머니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먹을 것이 떠오른다.
마땅한 군것질 꺼리가 없었던 가난한 시골마을에서 할머니가 만들어 주시는 음식들은 얼마나 맛나고 달았던지.

따뜻한 봄이 되면 보송보송한 하얀 털이 박힌 쑥들을 잘 다듬어 씻어, 물기를 쫙 뺀 후 쌀가루로 버무려 찜통에서 살짝 쪄 내면 되는 쑥범벅. 초록빛 그 고운 빛깔과 향기가 어우러진 그 맛.
여름이면 마당 한가운데 무쇠 솥을 걸어 놓고 자홍빛 팥을 푹 삶아 체에 걸러 빛깔 좋게 국물을 우려내어 팔팔 끓이다가 칼국수체 모양으로 만든 건더기를 넣어 눌지 않도록 잘 익혀셔 먹었던 팥죽의 달콤함.

대포 앞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장어를 들깨 듬뿍 갈아 넣어 만든 장어탕으로 동네 잔치를 벌였던 그 절묘한 맛.
한창 모내기철이면 논길을 따라 내가던 새참 바구니속에 담겨진 싱싱한 감자와 둥근 호박을 썰어 넣은 갈치조림은 언제나 군침을 돌게 했었다.

쌀쌀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벌교 갯벌에서 나는 참고막을 뜨거운 물에 살짝 데쳐 핏기만 가시게 해서 손톱이 다 해어질 정도로 까 먹어도 질리지 않았던 그 짭조름하던 그 맛.
할머니와 함께 이젠 마음속에 묻어야 한다. 똑같은 재료에도 손맛이 다르고 정성이 다른 법이어서 할머니 맛을 도저히 흉내낼 수 없으므로…….

언뜻 잠이 들었었나 보다.
창밖은 더 짙은 어둠만이 내려져 있고 사방은 온통 기차소리만 가득할 뿐 다들 깊은 잠들에 빠져있었다.
고향…….

그곳은 순수한 시절을 온통 감싸안고 사랑하는 이들을 다 기억해 주는 곳이다. 그래서 가슴시리도록 그립고 그리운 곳인가 보다.
사랑의 열병을 고3인 열아홉살 때 앓았다.
사랑 중에서도 가장 바보같은 짝사랑을 말이다.

나보다 한살 어린 그 아이는 눈에서 빛이 나는 총명하고 잘생긴 남자였다. 이미 멋진 여자친구까지 있는데다 키도 조그맣고 주근깨 투성이인 난 감히 욕심도 못 낼 멋진 남자.
주일마다 교회를 거르지 않았던 이유가 그 아이를 실컷 볼 수 있다는 것이었고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언제나 행복했었으니까…….

대입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늦가을밤.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의 쓸쓸함을 한껏 느끼며 교회 자습실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였다.
모든 학교가 지루하게 길던 중간고사시험이 끝나자 다른 아이들은 해방이다 싶어 그날만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익숙한 그 아이의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고 급기야 혼자서 나타난 것이다. 우린 둘이서 열심히 공부만 했던 것 같고 내가 수학문제를 물어 봤고 그 아이가 아주 쉽게 설명해 주었다. 그 시간이 두 시간 정도였을까.

난 평생을 살아가면서 그 두 시간을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아마 내 사랑하는 딸아이가 첫사랑을 내게 말한다면 난 이 두 시간의 추억으로 그 아이의 심정으로 돌아가 친구처럼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전 동네친구에게서 들었는데 그 아이는 사법고시에 패스했다고 했다. 아마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안내방송이 들렸다. 순천역에 도착하였으니 잊으신 물건 없이 잘 챙겨 안녕히 가시라고.
싸늘한 4월 새벽공기를 느끼며 이젠 영영 마음으로만 보아야 할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택시를 잡았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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