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조반원 실적제고 총력 조사능력 진일보 계기돼
`千里길도 한 걸음부터'란 속담이 어떤 일이든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다는 의미로 쓰인다면 영동진흥개발 특별세무조사 역시 50여명의 조사반원 모두가 휴일도 없이 밤낮으로 뛰어다니며 조사를 벌이다 어느새 종착역에 도달해 있었다.
특조반원들은 그 동안 탈세증거 확보를 위해 각 시중은행 문서보관소에서 눈을 비벼가며 먼지 묻은 마이크로필름을 판독해야 했고, 수천 군데에 이르는 거래처 중 의혹이 있는 부분은 직접 관련장부를 분석하며 사실여부를 따지기도 했다.
또한 때로는 영동진흥개발의 脫稅부분을 수사중인 검찰중수부 중수2과에 나가 계좌추적 등 검찰이 처리하기 어려운 업무를 부처간 협조차원에서 지원하거나, 수사관들과 토론을 벌이며 세무조사중 미처 파악하지 못한 부분을 적시해 세무조사에 참고하기도 했다.
반원 못지않게 반장 고충 또한 적지 않았다.
반장들 대부분이 비록 초임 사무관이긴 했지만 그 동안 연합조사반원 등에서 조사실력을 인정받은 국세청내 베테랑 요원들인 만큼 그들 나름대로 실적을 거양해야 할 일종의 의무감이나 강박감같은 것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별조사반이 정식으로 발족한 뒤 처음 맡은 특별조사라 반장들 모두가 엄청난 강박관념을 갖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조사에서는 어느 정도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조직내에는 늘 작용과 반작용이 있게 마련이어서 특별조사반의 역할이나 구성 등에 대해 일부에서는 논란도 적지 않았거든요”라는 某반장의 설명처럼 반장들은 특조반의 명예에 걸맞는 조사실적 제고를 위해 각 계열사에서 압류한 회계장부를 뒤척이는 한편 유사사례를 보며 탈세증거 확보에 바빴다.
“가장 큰 어려움은 워낙 국민적 관심이 큰 사건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었나 합니다”라는 한 반원(現 세무사)의 설명처럼 특조반원 뿐 아니라 수뇌부도 이를 상당히 부담스러워했던 것 같다.
그러나 영동진흥개발 특별세무조사가 각 분야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먼저 국세청 조사국의 특별조사 실력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계기가 마련됐다고 보여진다.
60년대 세무사찰, 70년대 유통과정추적조사 물가조사 생산수율조사 및 대기업 전담조사반 상설, 80년대 조사관 및 조사담당관 중심의 조사체제 확립 등으로 조사관련조직이 사회환경변화에 따라 변화해 왔지만 그 이후 현재의 특별조사국 태동의 모태가 됐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로서는 최신 조사기법인 계좌추적을 통한 자금의 흐름 파악을 본격화하는 등 다양한 조사기법의 개발을 통해 조사능력을 제고하여 특조반은 베테랑조사요원을 양성하는 사관학교 역할을 했다.
이와 함께 그 이후에 진행된 범양상선·포항제철·현대그룹세무조사사건 등 대형사건과 매년 정기적으로 진행된 호화·사치생활자 및 음성·불로소득자 등에 대한 조사에서도 특조반원들의 조사기법이나 조사능력이 십분 발휘됐다.
때문에 당시 특조반원으로 참여했던 사람들 중에는 지금도 서울청 P某서기관을 비롯해 L某·K某·C某사무관 등 20여명의 사무관 및 서기관들이 특별조사 및 일반조사에서 발군의 실력을 과시하고 있다.
경제·사회적 파장 또한 적지 않았다.
강력한 안정화 시책으로 80년대 초반의 혼란이 재연돼 경제운영에 많은 부담을 주었다.
또한 이철희 장영자·명성그룹사건에 이어 영동진흥개발사건이 연이어 발생해 인플레 유발, 금리불안 등 경제운영에 적잖은 부담으로 작용했다.
금융계 역시 정풍운동이 본격화, 조흥은행을 비롯한 각 시중은행들이 대대적인 자정운동을 전개해 문제직원을 추방하는 등 정화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해마다 대형경제사건이 잇따라 발생, 경제·사회전반에 걸친 국민들의 불신이 가중돼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불신을 심화시켜 정국운영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으며 결과적으로 '87년 민중항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기자
- Copyrights ⓒ 디지털세정신문 & taxtimes.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