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회장 강남일대 틈틈이 사논 땅
막대한 시세차익 사세확장 밑거름
제일여관 그랜드호텔 경영을 바탕으로 (주)영동에 이어 반도유스호스텔신축, 제일여관의 제일호텔 확장으로 이어진 이복예(李福禮) 회장의 기업설립 및 인수실적은 70년대 한강의 기적이란 경제신화만큼이나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73년 설립한 (주)영동진흥개발은 때마침 불어닥친 강남지역 도시개발 붐을 타고 영동일대에서 아파트 및 상가를 지어 분양하는 부동산 개발 전문사로 출발했다.
영동진흥개발은 테헤란로에 반도유스호스텔 공사를 비롯, 역시 역삼동에 초호화주택인 반도빌라와 강동구 방이동에 반도아파트를 각각 신축해 성황리에 분양했다.
영동진흥개발이 이처럼 고속성장을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李 회장이 20여년동안 제일여관과 그랜드호텔을 경영해 번 돈으로 틈틈이 사두었던 강남일대의 땅이었다.
60∼70년대만 해도 사과 배 등의 과일과 무 배추 등의 채소류를 생산해 강북 도시민에 공급하는 배후도시로 미개발지에 불과했던 강남일대 땅을 싼값에 매입해 개발이 본격화된 시점에서 자기땅에 상가나 아파트를 지어 높은 값에 분양해 이중삼중의 이득을 챙겼다.
이복예(李福禮) 회장이 미리 사두었던 땅에 아파트나 상가를 지어 분양하면서 토지매입비는 물론 지가상승으로 인한 막대한 시세차익을 거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동진흥개발은 이같은 자금원을 바탕으로 `죠다쉬'로 잘 알려진 중·고학생용 가방과 지갑 등을 생산 수출하는 도진실업과 동남아지역에 진출한 서일종합건설을 설립 혹은 인수했다.
죠다쉬는 정부의 중·고교생 교복자율화 등 교육자율화 정책에 힘입어 가방은 물론 양말 운동화 등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품목을 다양화하는 등 4∼5년동안 매년 외형을 크게 늘려 나갔다.
또 온양 제일여관과 그랜드호텔에 이어 부여·반도유스호스텔, 호텔제일, 불국사관광호텔도 각각 인수해 경영하는 등 호텔·여관업에도 적극 진출해 당시 본격화된 중·고등학생 수학여행을 유치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외에도 실내장식업체인 도진종합인테리어, 공구제작업체인 일광금형, 타월제조업체인 일복기업, 불록제조회사인 (주)코단을 설립한 데 이어 단자회사인 태평양투자금융과 화신상호신용금고에도 출자하는 등 社勢는 확장일로에 있었다.
결국 돈이 되는 사업은 물론 그룹운영에 필요하거나 관련이 있는 분야에는 모두 진출하거나 출자하는 등 문어발식 확장을 해 나가고 있었다.
기업이 이처럼 확장일로에 있다 보니 이복예(李福禮) 회장의 3형제도 자연스레 경영일선에 뛰어들어 영동진흥개발 서일종합건설 호텔제일 등 주력기업을 하나씩 맡아 운영하고 있었다.
먼저 이복예(李福禮)씨는 호텔제일의 대표이사 겸 사장과 영동진흥개발 회장을 맡아 영동진흥개발그룹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社主로서 그룹 운영과 관련한 주요 사항을 진두지휘해 나가고 있었다.
장남인 곽창배 사장은 서일종합건설 부사장으로 도로 주택 상·하수도 건설 및 보수를 담당하는 해외공사를 전담했다.
서일종합건설은 7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건설업의 해외진출을 바탕으로 '82년 사업분에 11억8천6백만원의 흑자를 기록할 만큼 알찬 건설회사로 알려졌으며 국내도급순위 64위를 기록할 만큼 견실한 회사였다.
곽 사장은 이외에도 일복기업이란 빌딩관리회사와 블록제조업체인 코단을 운영하고 있었다.
차남인 근배씨가 대표이사 겸사장을 맡고 3남인 경배씨가 부사장으로 있는 영동진흥개발은 자본금 50억원으로 '82년 당기순이익은 1억4천3백만원이었으나 실제이익은 이보다 훨씬 클 것으로 경영상의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다.
영동진흥개발은 사건발생 직전인 '84.9.12 강동구 방이동에 12층짜리 14동 9백36가구분의 반도아파트를 성공리에 분양해 만기가 도래한 어음을 결제하는 등 그룹의 주요 자금원 노릇을 톡톡히 수행했다.
또 '83년에는 인천간호전문학교를 인수해 교육분야에까지 영역을 끊임없이 넓혀가는 등 몸집을 키우는 데 열중했으나 반도유스호스텔 신축공사의 시행착오와 부평에 지은 아파트의 분양실패 등으로 초래된 심각한 자금난은 걷잡을 수 없는 악화일로로 치닫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