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빈(임신빈) 세무사
韓·日세무사친선협회 회원들이 일본 동경 한일우호세리사연맹과의 동경총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여기에 동참의 권유를 받고 처음에는 다소 망설였다. 다리부상이 완쾌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일본이라는 나라와 일본어에 대한 어릴 적 가슴에 박힌 좋지않은 감정으로 인해 생긴 폐쇄된 감정 때문이였으리라.
일제강점말기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우리의 모국어 한글 대신에 일어인 가다가나 히라가나를 배워야 했다. 2학년때부터는 등교후 우리말을 못하게 하고 일어만 사용하도록 강요당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생이 일상 용어를 일어로만 사용하기란 흐르는 물줄기를 돌려놓는 것 만큼이나 힘들었고 분통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일어로 몇마디 하다가도 불쑥 우리말이 튀어나오기 일쑤였다. 그럴때면 남학생 중에는 잽싸게 일본인 교사에게 고자질해서 여학생들을 울렸다. 일본인 교사는 여지없이 빨간망토, 하얀망토가 나온다는 화장실 앞에 벌 세우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대동아전쟁이 어떤 것인지 식민지 정치가 무엇인지는 감지하지 못했어도 창씨개명, 쌀 공출, 유기그릇 탈취, 강제징용, 강제학병 등을 보면서 어린 가슴에 알 수 없는 적개심의 싹이 자랐다고나 할까. 일본에 대한 감정이 나쁘게 못이 박히게 되었다. 4학년에 올라가 8.15해방을 맞았다. 그때부터 일어와 일본문자를 흙먼지를 털어내듯 뇌리속에서 지워버리려 애썼다. 50여년의 세월을 그렇게 지내왔었다.
어린 가슴에 조국은 어떤 존재로 비춰졌던 것일까. 주체의식이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지난 날의 슬펐던 일본과의 역사는 어떻게 접어가야 할 지 곰곰이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우리 일행은 '99.10.1 2시10분전에 일본 동경의 세미나장에 도착하였다. 일본측 세리사 70여명은 모두 자리에 정좌하고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좌석마다 달필의 붓으로 쓴 이름표가 놓여있어 눈길을 끌었다. 자리에는 행사일정 안내, 한일우호세리사연맹의 임원 및 참석자 명단, 세미나내용 책자 및 프린트물 등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안내자의 친절, 웃는 표정들이 정을 느끼게 했다.
우리 한국사람들은 대부분 무뚝뚝하고 무표정하고 불친절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있다. 또 즉흥적이고 `빨리빨리'란 용어가 입에 붙은 것처럼 급한 행동들 때문에 불안을 느끼게 하지만 일본사람들을 보면서 차분하고 조용하게 조직적이고 계획적이며 예의바른 인사성이 뛰어남을 새삼 느꼈다.
70여명의 회원 전원이 정시전에 와서 자리에 정좌하고 손님을 맞이하는 예가 마음에 다가와 훈훈함과 함께 좋은 인상을 갖게 했다. 장락 이사님이 일어로 혹은 한국어로 유창하게 통역을 담당하셨다. `한국세무사업계의 현안과 대처방안'은 조중형 고문께서, `국세행정 조직개혁과 세무사제도의 개편'은 이원우 부회장께서 설명했을때 일본 세리사들은 많은 관심을 보였던 것 같다.
일본측에서 내놓은 `한일자유무역협정 구상', `98년 미국내국세입청(IRS) 재편성 개혁법의 서평', `법인사업세의 외형표준과세에 관한 동향' 등 양국의 현안문제들의 정보교환이 이루어졌다.
일본측 세미나 내용 프린트 준비물에 비하면 우리측에서 준비한 세미나 책자는 일어로 번역하는 등 완벽했다는 평을 하고 싶다. 기념품 교환순서는 인상적이었고, 더욱이 이양자 세무사와 나는 처음으로 여성세무사 참석으로 특별선물까지 받으며 환대받고 보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공식행사가 끝나고 일본세리사측에서 마련한 SYMPHONY(CRUISE)라 불리우는 유람선 선상에 초대되어 동경의 네온사인을 구경하면서 프랑스 요리를 대접받았다. 각 테이블마다 한국 유학생들을 배치시켜 통역하게 해서 환담을 나눌 수 있게 한 꼼꼼한 배려에 다시 감탄을 했다. 우리는 선취에 몸을 맡기고 한일우호세리사연맹 회장의 명창을 듣고 자진해서 마이크를 잡는 세리사들이 우리들을 즐겁게 해주려는 호의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즐거워하면서 노래하고 술을 권하고 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의 폐쇄된 감정을 한 구석 한 구석 무너뜨리고 있었다.
우리가 조국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 숙명임에는 틀림이 없지 않은가. 또한 우리의 괴로웠던 역사를 묻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로미오와 줄리엣의 영화필름이 스쳐갔다. 선대의 악연이 새 세대까지 세습되어 얻어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꼽아보는 것이다.
이제 21세기의 새 시대가 열리고 있지 않은가. 21세기는 정보화시대인 것이다. 현대의 시장은 더 이상 지역적이어서는 안된다. 국가적이어도 안되고 세계적인 것이어야 한다. 세계적인 이해가 필요한 시대인 것이다.
우리들을 환영해 주고 만남을 기뻐하고 정보를 교환하는 이웃 사랑이 필요한 시대임을 깨달아야 할 시기가 아닌가. 일본의 세제에 대한 정보를 얻고 우리의 세제개혁을 평가해 보며발전을 유도해야 될 것이다. 저 노래하고 춤추고 환영해주는 일본세리사 중에도 범인이 있고 학인도, 철인도, 연구가도, 노력가도, 선인도, 실력가도 있는 것이다. 우리와 다른 것이 있다면 조국의 국호가 다를 뿐이 아니겠는가.
현대는 다문화 접촉을 해야하고 민족간의 감정을 완화시켜 선진적 제도를 수용하여 도약의 발판을 삼어야 할 때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나의 작은 폐쇄된 감정도 동해바다에 수장시켜야 되겠다고 생각하며 귀국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