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욱(서대구署)
얼음골 너덜지대를 올라 한 번 숨을 몰아 쉰다.
허 준이 스승의 몸에 칼을 대었던 동의굴 허물어진 절벽에는 고드름이 허연 수염을 하고 있다.
볼을 찢는듯 사자봉을 향해 바람이 불어 대는데 양지바른 사자평 억새밭에 드러누워 오수를 즐긴다.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몸, 스스로 心身을 치며 단련해 호연지기를 기른다.
둥실둥실 산을 넘는 머얼건 죽 한 그릇같은 생, 어떤 모습으로 내 그릇에 담을까?
억새의 평원을 말없이 말없이 걷는다.
버스는 아침 9시경에 얼음굴의 주차장에 다다랐다. 모두들 장비를 차리는 분주한 소리가 마치 산을 정복하려는 군대의 모습처럼 비장하게 들린다. 한여름에 자연히 얼음이 어는 신기한 곳, 인간의 상식은 너무나 짧은 것이다. 이러한 자연현상에서 나는 배우고 싶은 것이 있다. 항상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이다.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주장한 것이 허무하게 거짓으로 무너질 때를 경험하지 않았던가? 문화유적처럼 쇠울타리에 귀하게 둘러싸인 얼음굴이 주는 의미는 사람의 상식이라는 것을 의지하지 말라는 뜻이겠지. 나의 주장을 조금 접고 상대방의 생각을 깊이 받아들이자고 생각해 본다. 한여름에 맨땅에서 얼음이 얼 수도 있지 않는가 말이다.
이번 산행에서 귀한 손님 한분 모시고 간 탓에 매번 탈피하지 못한 후미를 또 장식하게 됐다.
후미 가이드의 재촉을 받으며 산산히 바위 부숴져 내린 너덜길을 기어올라간다. 양쪽으로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린 거대한 바위산이 둘러싸고 있다. 영하 5도의 추운 날에다 계곡을 향해 불어오는 바람은 산에 도전하는 자의 전의를 불태우게 한다. 엄홍길이 차디찬 네팔의 히말라야를 오르는 이유에 대한 해답은 좀처럼 알 수 없지만 힘겨운 산을 오르다 보면 조금 알듯도 하다.
허준 선생, 비록 스승 유의태를 해부했는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일찍이 한반도에서 볼 수 없었던 실험정신의 대명사임에는 분명하다. 냉동시설이 없던 시대에 차가운 냉기로 둘러싸인 동굴을 찾아 이 높고 험한 곳까지 손수 찾았던 선생의 기상을 생각하면 나는 우물안 개구리 내지는 주어진 환경을 벗어나지 못하는 꽉 막힌 인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맨 후미에 가는 입장에 이곳저곳 다 들여다보고 가는 것이 선두에 미안하지만 남보다 하나 더 보고 가겠다는 욕심만은 어여쁘게 봐주겠지 생각하며 한발을 돌려 동굴을 찾는다. 바위 절벽을 돌아봤으나 안타깝게도 동굴은 없다. 다만 동굴이 있었을 듯 부숴진 바위조각들이 계곡을 가득 메우고 있다.
너른 벌판에 물결치는 억새, 나는 그것이 푸르른 날을 기억한다. 날카롭고 거친 이파리를 세우고 행인의 발목에 생채기를 내던 고약한 근성이 황혼의 빛으로 사자평을 덮고 있다. 억새, 나는 그 이름을 한민족에게 붙이고 싶다. 열강에 둘러싸여 숱한 고난의 길에서 꿋꿋이 살아남아 저렇게 처절한 외침 속에 황홀하게 물든 풀이다. 한편으로 잡초의 정신이 우리 삶에 갖춰야 할 주요한 덕목의 하나라고 생각해 온 지도 오래이다. 결코 호사스럽지 않으면서 궁색하지도 않은 억새, 그 누가 짓밟고 가더라도 꿋꿋이 대궁을 세우는 억새는 가을이 들어야 그저 아름답기만 한 풀은 아니다.
김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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