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겨울을 裝飾하는 향내없는 粉白이지만 곱기는 봄철에 보는 꽃보다 못할 것도 없다.
바람없이 살랑살랑 내리는 가루눈(粉雪)도 좋고, 朔風을 따라 세차게 날리는 눈보라(吹雪)도 나쁘지 않지만, 솜덩이 처럼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이 역시 그중의 壓卷이라 할 것이다.
눈은 도시와 시골 山村과 들녘 그 어느 곳인들 가리지 않지만 역시 고즈넉한 山村에서 보는 雪景이 가장 으뜸이다.
높은 산허리에 부딪쳐서 旋回하는 강한 바람에 실려 빙빙 돌면서 날으는 눈발의 壯快한 모습….
자고 새면 솔잎위에 두툼이 쌓인 純白色의 雪花가 아침의 눈부신 햇빛을 받아 연한 금빛으로 반짝인다.
뜨락에 지다 남은 殘菊에도 점점이 흰눈이 쌓이고, 百日紅과 감나무의 裸木의 가지에도 곱게 雪花가 피었는데 마을에 어린 강아지들도 신이 난 듯 닫혀진 사립문을 밀치고 나와 좁은 고삿길에서 제 세상 만난 듯 뛰어 논다.
밤이 되자 바람은 자고 눈은 함박눈으로 변하여 굵은 솜덩이를 뿌린다.
어스름 달빛속에 나비처럼 춤을 추는 눈송이의 群舞는 사람을 깊은 밤중에 차디찬 툇마루로 끌어낸다.
그까짓 달빛은 없어도 좋고, 있으면 더욱 좋고, 雪白의 온 天地가 그대로 밝은 불빛이요, 하늘 가득히 내리는 눈송이는 밝고 맑은 달빛이다.
눈들의 翔舞에 맞추어 '玄妙한 주악'이 들린다. 높은 산 솔밭을 스치는 바람소리와 그 속에 섞이는 마을의 개짓는 소리의 앙상블(합주).
그 모두가 이 한밤 '눈의 饗宴'에 흥을 돋우는 화현인 것이다.
아까 석양녘에 백설에 뒤덮힌 蓮 방죽에 내려앉은 한쌍의 기러기 생각이 난다. 아무리 늙고 시들었어도 '옛 情緣의 갈대밭속이 좋아서' 아무 거리낌없이 제집처럼 척척 내려앉는 그들의 하루밤 잠자리가 부디 平安했으면 하고 빈다.
아침이 되자 마을 초가지붕은 돌버섯(석이)처럼 하얗게 눈에 덮이고 여기저기 밥짓는 검은 연기가 솟아오른다.
가난하지만 忘形의 따뜻한 溫情이 있는 山村의 겨울 風景, 마을 뒤 숲속과 초가지붕 처마밑에 잠잔 참새들의 지저귀는 소리에 이끌려 아침해가 솟는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잠든 '原初의 혼정'속에서도 다가오는 봄을 준비하는 부산한 生動이 보인다. 설 한풍이 아무리 모질고 드세어도 얼어붙은 단단한 地殼을 헤집고 나오는 生命力의 噴出은 멈추지를 않는다.
두고온 시골마을, 산과 계곡, 푸른 연못이 있는 마을을 떠올리며, 다음과 같은 어줍은 詩(斷章) 한귀를 소리내어 읊어 본다.
'雪風生追惜 置之書未讀 隻雁려不絶 春色在籬下'
'세찬 눈바람에 세상 떠난 사람 생각이 나서 머리맡에 둔 책을 읽지 못했다. 못속에 외기러기 우는 소리 그치지 않지만 향기로운 봄빛은 집울타리 밑에 와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