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국세공무원 문예콘데스트 수상작-수필부문 금상

2001.10.15 00:00:00

아버지와 소



해가 지고 세상이 어둠에 잠길 무렵, 차 한대 겨우 지날만한 신작로에 소 방울 소리가 요란하다. 주인도 없이 소 한 마리가 줄을 질질 끌며 터벅터벅 지친 걸음을 걷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는 소를 외양간에 들이고, 아버지를 찾아, 소가 왔던 사십리 길을 추적해 가신다. 그러면 아버지는 오늘도 여지없이, 술이 떡이 되어 남의 무덤을 배게삼아 고단한 하루일과를 마감하고 계신다.
참 대견도 하지! 힘만 셀 뿐 우둔한 짐승이라 놀림당하던 소가 야심한 밤에 그 먼 길을 혼자서 찾아오다니. 어떻게 차량행렬이 끊이지 않는 도로를 지나서, 갈래갈래 찢어진 길과, 서로 비슷한 슬래브 지붕들을 혼동하지 않고 정확히 제 집을 찾아 올 수 있었을까?

도중에 소가 잘못되기라도 했다면, 아버지 또한 싸늘한 저녁 날씨에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마운 녀석……. 네 녀석이 아버지를 살렸다.
아버지가 소와 맺은 인연은 각별하다. 아버지 나이 열넷 되던 해, 말 집 할아버지로부터 삼년치 품삯을 송아지로 대신 받으면서, 소의 매력에 감동하여 잠을 잊은 지 몇날 며칠, 잘빠진 처녀 엉덩이보다도 튼튼한 암소 궁둥이가 더 탐이 났던 청년의 시절로, 커다란 사료포대에 각양각색의 소들을 밤새껏 그려넣던 중년의 시절로, 환갑이 훨씬 지난 지금은 소에 관한 한 베테랑이라 자부하지만, 세월은 경륜만큼이나 건강을 앗아가버렸다.
해마다 반복되는 자식들의 만류와 논갈이를 부탁하는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나름대로 결단을 내리기까지는 소가 유일한 해답이었으리라.
추워지면 다시는 논갈이를 하지 않겠다고 오히려 자식들 편이 되어 진저리치며, 쟁기를 불사르기까지 하는 굳은 의지를 피력하지만, 봄이 오면 새로 만든 쟁기를 가지고 이른 새벽부터 일터로 나가신다.

소는 우리의 희망이며 고통이다. 우리 집안의 역사이자 생활의 방편이기에 고맙게 감당해야겠지만, 하루종일 소와 씨름하는 것이 우리를 지치게 한다. 지금껏 아버지는 다른 것을 차치하고라도, 소에게만은 온간 헌신을 다해 줄 것을 가족들에게 요구하였고,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동생들은 아버지와 대립하고 급기야 집을 나가버리는 사태까지 경험하였다.
서로 언성이 높아지면 만만한 것이 소인가 보다. 아버지 앞이라 어쩌지 못하고 애꿎은 소한테 발길질이다. 이에, 소는 성내거나 억울해하지 않는다. 잠시 요동하다가 금새 가라앉고는 늘상 하던대로 되새김질에 여념이 없다.
참 속이 편한 놈이다.

소는 하늘의 처사에 순응할 줄 안다. 먼길, 어쩌면 마지막 길을 가는 녀석에게 아버지는 따스한 밥 한끼로 양해를 구한다. 그게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이다. 녀석이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듯, 죽 한통을 깨끗이 비워놓는다. 그 모습이 아버지를 더욱 슬프게 한다. 가끔씩, 이렇게 떠나기가 억울한지 고집을 피우기도 하지만, 그도 잠시뿐, 이내 순종하다. 살아생전 주인을 위해 충성하고 이제 몸이라도 남길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는 식이다.
나는 지금껏 아버지와 소를 둘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어릴적에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목, 먼발치에서 달구지가 보일라치면 다른 길로 돌아가거나 잽싸게 지나쳐 버렸다. 집에 돌아오신 아버지는 너무 서운했는지 노발대발이시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수없이 많은 직업 중에 왜 하필 소를 선택했는지, 나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였지만, 언제부턴가 그토록 싫어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나를 통해 재현되고 있음을 알았을 적, 이미 나를 평가할 연령에 찬, 두 아이의 아버지였다.

그제서야, 아버지와 소가 운명의 끈으로 엮어졌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얼마전 가족이 오랜만에 외식을 하고 돌아온 날, 당번으로 남아있던 막내 동생이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송아지들이 방목장을 뚫고 뛰쳐나온 것이다. 동생이 밧줄로 오라를 만들어 송아지 발목을 잡아 묶는 현장을 목격한 아버지는 동생을 격려하기보다는 도리어 심하게 다루었다고 호통을 치셨다. 소에게 한 행동이 마치 당신에게 그런 것처럼 느껴서일까?
그 날 이후로 동생은 서운한 마음에 한동안 방문을 굳게 닫아걸고 두문불출했다. “아버지에게 소라는 존재가 자식보다 중하단 말인가?” 의구심을 품게 하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나는 아버지를 이해한다. 아버지가 선택한 삶을 인정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봄날 보리엎듯 수없이 뒤집는 과정을 거듭한 채, 결과만을 가지고 성공을 논하지만, 소와 더불어 반세기를 사는 동안 단 한번의 외도없이 한 가지 일에 몰두하였던 아버지의 집념을 나는 논하고 싶다.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인가?
소에게서 과연 미래를 보았을까?
내게 있어, 소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이어주는 고리다.
소는 자기분수를 알고 자족하는 편이며, 또한 소는 양반이다. 날이 저물었다고 서둘러 길을 재촉하지 않고, 장마철 궂은 비에도 촐랑대어 뛰지 않는 게 소의 성품이다.
소는 자기의 갈길을 간다. 소는 자기가 지나온 길을 간다. 인생을 달관한 현학자인양, 오히려 목적지를 향해가는 배와 같다. 아버지가 평생 한길을 걸어오신 것은 어찌보면 소의 전형이다.

나는 소의 전형을 닮고 싶다. 아버지가 오직 한길을 고집하셨던 것처럼 나도 한길을 걷고 싶다. 먼 옛날 유대인들이 천대시하던 세리라는 직업을, 오늘날 내가 국세공무원으로 살아가노라면 사명감과 자부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 하루 세끼의 식사에 연연하고 싶지 않다. 변화무쌍한 세상에 유행따라 부유하지 않으며, 비록 남이 몰라준다 해도 내가 선택한 길을 고집하며 사는 것, 그것이 바로 나의 인생이다.

-정 일 만 군산署 세원관리



문영재 기자 info@taxtimes.co.kr
- Copyrights ⓒ 디지털세정신문 & taxtimes.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발행처: (주)한국세정신문사 ㅣ 주소: 서울시 마포구 동교로17안길 11 (서교동, 디.에스 빌딩 3층) 제호:한국세정신문 │ 등록번호: 서울,아00096 등록(발행)일:2005년 10월 28일 │ 발행인: 박화수 │ 편집인: 오상민 한국세정신문 전화: 02-338-3344 │ 팩스: 02-338-3343 │ 청소년보호책임자: 박화수 Copyright ⓒ 한국세정신문 ,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