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A 시대의 원산지 정책을 경제 안보 시대에 맞게 바꾸자

2026.09.03 08:30:00

관세 혜택을 판정하던 원산지에서 공급망과 경제 국적을 판단하는 원산지로

 

우리에게 ‘원산지’라는 말은 오랫동안 자유무역협정(FTA)과 함께 사용됐다. 한국산으로 인정받으면 상대국에서 낮은 협정관세를 적용받을 수 있고, 수입 물품이 협정 상대국의 원산지 기준을 충족하면 우리나라에서도 관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기업에게 원산지는 주로 “FTA 특혜관세를 받을 수 있느냐”의 문제였으며, 정부의 원산지 정책 역시 “FTA 활용을 지원하고 원산지 위반을 검증·단속”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경제 안보 시대가 되면서 원산지의 의미가 달라지고 있다. 이제 세계는 완제품의 생산국만 묻지 않는다. 어느 나라의 원료를 사용했는지, 핵심 부품은 어디에서 생산되었는지, 핵심 공정은 어디에서 이루어졌는지, 어느 국가와 기업이 공급망을 지배하고 있는지까지 따지기 시작했다.

 

FTA 시대의 원산지가 ‘관세 혜택을 위한 원산지’였다면, 경제 안보 시대의 원산지는 원산지 정보를 ‘공급망을 판단하는 정보’로까지 확대해서 볼 필요가 있다.

 

FTA 원산지는 '상품의 법적 국적'을 판정했다

 

 FTA에서 원산지가 중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한국과 FTA를 체결한 국가의 물품이라고 해서 모두 협정관세를 적용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제3국에서 생산한 물품을 단순히 FTA 상대국을 거쳐 수입했다고 해서 그 나라의 원산지 물품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품목별로 완전생산기준, 세번변경기준, 부가가치기준, 특정공정기준 등 다양한 원산지 결정 기준을 두고 있다.

 

우리 기업들은 이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 원재료와 부품의 원산지를 확인하고 증빙자료를 보관하며 원산지증명서를 발급해 왔다. 세관도 사후 검증 등을 통해 원산지 기준 충족 여부를 확인해 왔다.

 

대한민국은 세계적으로 광범위한 FTA 네트워크를 구축했고 이를 활용하여 우리 기업의 수출경쟁력을 높여 왔다. 기업의 원산지 관리 능력 역시 중요한 경쟁력이 되었다. 그러나 경제 안보 시대의 원산지는 상품의 경제국적을 파악해야 한다

 

FTA 원산지가 “이 물품에 낮은 관세를 적용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면 경제 안보의 관점에서는 “이 상품과 공급망은 실제로 어느 국가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가?”라는 질문까지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완제품의 최종 조립이 A국에서 이루어졌다고 하자. 기존 원산지 기준에 따라 A 국산으로 인정될 수 있다. 그러나 핵심 광물은 B국에서 생산되고 주요 소재와 부품은 C국에서 공급되며, 핵심 기술이나 생산설비는 D국에 의존하고 있다면 이 상품의 경제적 실체를 단순히 A 국산이라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까. 경제 안보의 관점에서는 부족하다.

 

특정 국가와의 관계가 악화하거나 수출통제가 이루어져 핵심 소재의 공급이 중단되어 생산 자체가 불가능하다면, 공급망 관리에서는 최종 조립국보다 핵심 원료나 부품을 공급하는 국가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제 원산지를 상품에 붙어 있는 하나의 국적 표시로만 볼 것이 아니라 공급망 전체를 파악하는 중요한 정보로 활용해야 한다. ‘상품의 경제 국적’을 파악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경제 안보 원산지’는 새로운 법적 원산지 기준을 만들자는 뜻이 아니다. FTA나 WTO 체제에서 사용하는 원산지 규정은 국제적인 약속과 국내 법령에 따라 운영되어야 한다. 기존의 법적 원산지 판정 체계를 경제 안보라는 이유로 임의로 바꾸자는 것이 아니다.

 

필자가 강조하는 것은 국가의 산업·공급망 정책을 수립할 때 법적 원산지만으로 판단해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하나의 제품에는 여러 국가가 참여한다. 원료의 생산국이 있고, 핵심 소재의 가공국이 있으며, 주요 부품의 생산국과 최종 조립국이 서로 다를 수 있다. 여기에 기술을 보유한 기업의 국가와 핵심 생산설비의 공급국까지 고려하면 현대의 상품에는 사실상 여러 층위의 ‘경제적 국적’이 존재한다. 반도체와 배터리, 전기자동차, 의약품, 통신장비와 같은 첨단제품일수록 이러한 현상은 더욱 뚜렷하다.

 

따라서 경제 안보 정책에서는 최소한 핵심 원료의 생산국, 주요 소재·부품의 생산국, 핵심 공정의 수행 국, 최종 생산국 등을 함께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특정 국가에 대한 실제 의존도를 알 수 있다.

 

수입 통계만으로는 공급망의 실체를 놓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가 어떤 핵심 부품을 A 국에서 주로 수입하고 있다고 하자. 통관통계만 보면 A 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부품을 만드는 핵심 원료가 대부분 B 국에서 공급된다면 실제 공급망 위험은 A국뿐 아니라 B 국에도 존재한다. B 국의 수출통제나 생산 중단이 발생하면 A 국에서의 부품 생산이 어려워지고 결국 우리 기업의 생산까지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수입국이 여러 국가로 분산되어 있어 겉으로는 공급망이 안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 국가가 사용하는 핵심 원료나 소재가 사실상 한 국가에 집중되어 있다면 실질적인 공급망 다변화라고 보기 어렵다. 이것이 경제 안보 시대에 원산지 정보가 중요한 이유다.

 

어디에서 수입했는가만 볼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만들어졌고, 무엇으로 만들어졌으며, 핵심 공급망을 누가 지배하고 있는가까지 알아야 한다. 미국과 EU의 변화가 우리 기업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주요국의 정책은 이미 이러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미국은 관세뿐 아니라 수출통제, 투자규제, 정부조달, 산업 지원 정책 등을 결합하면서 제품의 최종 생산 지역뿐 아니라 핵심 부품과 원료의 공급망을 중요하게 보고 있다.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서 전기자동차 배터리의 핵심 광물과 부품의 조달 요건을 따지는 것도 공급망의 출처가 산업정책과 연결되는 대표적인 사례다.

 

EU 역시 탄소, 배터리, 공급망 실사 등 여러 제도를 통해 완제품 자체뿐 아니라 생산과정과 공급망에 관한 정보를 기업에 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 기업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앞으로 우리 기업이 해외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Made in Korea”라는 사실만 증명해서는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더욱 늘어날 것이다. 핵심 원료가 어디에서 생산되었는지, 주요 부품을 어디에서 조달했는지, 특정 국가나 기업과 공급망이 어느 정도 연결되어 있는지까지 관리해야 한다.

 

따라서 원산지 관리를 통관부서나 FTA 담당자의 업무에만 맡겨둘 수 없다. 구매·조달, 생산, 해외투자, 통상, 관세 업무가 하나의 공급망 관리 체계 안에서 연결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원산지 정책은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필자는 이제 정부 차원의 ‘국가 원산지 전략’을 수립할 것을 제안한다.

 

지금까지의 원산지 정책은 FTA 체결과 활용, 원산지 증명, 검증과 단속 등 개별 제도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앞으로는 이를 넘어 FTA·통상·산업·공급망·경제 안보를 연결하는 국가 차원의 원산지 전략이 필요하다.

 

첫째, FTA 원산지와 경제 안보 차원의 공급망 원산지 정보를 함께 관리해야 한다.

FTA 특혜 여부를 판단하는 법적 원산지 체계는 그대로 유지하되, 국가 핵심 품목에 대해서는 원료·소재·부품·공정별 공급국을 파악하는 경제 안보 차원의 공급망 관리 체계를 추가해야 한다.

 

둘째, 핵심 품목의 ‘원산지 공급망 지도’를 구축해야 한다.

반도체, 배터리, 핵심 광물, 자동차, 의약품, 에너지, 방위산업 등 전략 산업별로 핵심 원료와 부품이 어느 국가에서 생산되고 어떤 경로를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오는지를 단계별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수입국은 여러 나라로 분산되어 있지만 원료의 실제 생산지가 특정 국가에 집중되어 있는 ‘숨은 의존도’를 찾아내는 것이 핵심이다.

 

셋째, 관세청의 무역·원산지 정보를 국가 경제 안보 정책에 적극 활용해야 한다.

관세청은 수출입신고와 FTA 원산지 검증 등을 통해 방대한 무역 관련 정보를 축적하고 있다. 그러나 통관 정보만으로 복잡한 글로벌 공급망 전체를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관세청이 보유한 수출입·원산지 정보를 산업·통상·자원·공급망 정보와 연계하는 국가 차원의 데이터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특정 품목의 수입이 어느 국가에 집중되어 있는지뿐 아니라 그 배후의 원료와 부품 공급망까지 분석하여 국가 공급망의 취약성을 더 정밀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기업의 원산지 관리도 ‘증명’에서 ‘경영’으로 바꾸어야 한다.

기업이 FTA 원산지증명서를 발급하기 위해 자료를 관리하는 수준을 넘어 핵심 원료와 부품의 원산지를 상시적으로 파악하고 특정국 의존도를 관리하도록 해야 한다.

 

특히 중견·중소기업이 복잡한 글로벌 공급망을 스스로 분석하기는 쉽지 않다. 정부와 관세청이 주요국의 원산지·공급망 규제와 핵심 품목별 위험 정보를 제공하고 기업의 공급망 진단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

 

원산지 관리가 곧 공급망 리스크관리가 되어야 한다. 원산지 정책을 산업 보호의 방패로도 활용하자. 경제 안보 시대에는 원산지가 우리 기업의 FTA 활용을 지원하는 수단인 동시에 우리 시장과 산업을 지키는 장치가 되어야 한다.

 

제3국 물품이 단순 가공이나 우회 수출을 거쳐 FTA 상대국의 물품으로 둔갑하거나, 무역구제조치를 회피하기 위해 생산국을 바꾸어 신고하는 경우 국내 산업이 피해를 볼 수 있다. 세계적으로 보호무역 조치가 늘어날수록 우회 수출과 원산지 세탁 문제도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원산지 검증을 단순히 관세를 더 걷기 위한 사후 심사로 보아서는 안 된다. 국내 산업을 보호하고 불공정한 우회무역을 차단하는 ‘경제 안보형 국경 관리 수단’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동시에 우리 수출기업이 해외에서 원산지 문제로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정부가 주요국의 원산지 규정과 공급망 규제를 분석하여 선제적으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공격과 방어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 기업이 FTA와 글로벌 공급망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도록 지원하는 한편, 원산지를 세탁한 우회 수입으로 국내 산업이 피해를 보는 것도 막아야 한다.

 

'Made in Korea'를 넘어 'Korea Supply Chain'으로

 

대한민국은 원자재를 수입하여 가공하고 고부가가치 제품을 세계에 수출하며 성장한 나라다. 그래서 우리에게 원산지 문제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 중요하다.

 

FTA 시대에는 “한국산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가?”가 중요했다. 경제 안보 시대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의 산업이 어떤 국가의 공급망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앞으로의 원산지 정책은 이 두 질문에 모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FTA 원산지가 상품의 법적 국적을 판단한다면 경제 안보 차원의 원산지 정보는 상품과 산업의 경제적 연결망을 보여준다. 이 두 체계를 연결할 때 원산지는 단순한 통관제도를 넘어 국가전략의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지난 제5회에서 필자는 관세율을 세수 중심에서 산업·공급망 정책으로 전환하고 ‘핵심 공급망 품목 관세 지도’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여기에 이번에 제안한 ‘원산지 공급망 지도’를 결합해 보자.

 

무엇을 얼마나 수입하는지만 보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무엇을 사용하여,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상품을 수입하고 있는지까지 파악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대한민국의 공급망 위험을 더 정확하게 볼 수 있다.

 

이제 원산지를 FTA 관세 혜택을 받기 위한 증명서의 문제에만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 FTA 시대의 원산지에서 경제 안보 시대의 원산지로 정책의 시야를 넓혀야 한다. ‘Made in Korea’를 판정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Korea Supply Chain’을 관리해야 한다.

 

그 출발점은 정부 차원의 ‘국가 원산지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다. 경제 안보 시대에는 원산지도 국가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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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기 (사)관세동우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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