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년간 조세정책 개편에 대한 논의가 나올 때마다 인구에 회자되는 기본 원칙으로 '넓은 세원, 낮은 세율'이 자주 거론된다. 첫번째 원칙(넓은 세원)은 세원을 넓게 함으로써 공평과세를 실현함과 동시에 세수원천을 넓게 함으로써 세수기반을 강화함을 의미한다. 두번째 원칙(낮은 세율)은 첫 번째 원칙이 성립한다는 전제하에 세율을 낮게 유지하더라도 충분한 세수를 확보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특정한 소수에게 세부담이 집중됨에 따라 야기될 수 있는 부작용을 최소화한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원칙에 비춰볼 때 작금의 제반 조세환경은 어떠한가? 매우 복잡한 조세체계와 수많은 담세자들에 대한 세부담 귀착 분석이 쉽지 않기 때문에 100% 신뢰할 수 있는 확정적인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우리나라의 조세여건을 평가하자면, '낮은 세율'에는 비교적 충실하지만 '넓은 세원'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총세부담 측면에서 볼 때, 미국과 일본을 제외하면, OECD 국가 중 우리나라는 조세부담률이 가장 낮은 국가들 중 하나라는 점에서 '낮은 세율'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세목별로 본다면 소득세 실효세부담률이 과세대상소득 대비 3∼4% 수준에 불과하고 부가가치세율이 10%로 서구선진국(15∼25%)에 비해 현저하게 낮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인구의 급격한 고령화와 경제선진화에 따른 복지 수요의 급증 및 빈곤문제의 해결은 우리가 당면한 주요 현안이다. 이런 요인들은 장차 재정수요를 급격하게 증대시킬 것이다. 따라서 중·장기적으로 세수기반의 확대는 불가피한 명제라고 할 수 있다.
세수기반의 확대는, 앞서 제기한 '넓은 세원, 낮은 세율' 원칙 하에서 이뤄져야 한다. 이 가운데 낮은 세율은 이미 우리 세제구조에 잘 정착된 측면이 있다. 그러므로 그보다는 '넓은 세원' 원칙에 충실해 조세체계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 물론 세원 측면에서 세율이 과다하게 높거나 또는 과소하게 낮은 부분도 있는 만큼 부분적으로는 세율체계 개편도 필요하다.
'넓은 세원' 원칙과 관련해 세원의 폭을 논함에 있어서는 세부담의 집중도, 과표양성화 수준, 소득·소비·재산과세의 세원별 분포 또는 비중 차이 등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넓은 세원을 지향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세부담 분포가 넓게 퍼지도록 하거나, 과세의 사각지대를 줄임으로써 과표양성화율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아울러 폭이 좁은 세원의 세수 비중을 낮추는 대신, 폭이 넓은 세원의 세수 비중을 높이는 방향으로 개편도 '넓은 세원'의 원칙에 충실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이다.
세부담의 집중도가 지나치게 높으면 세율 인상보다는 세부담이 과소한 부분의 실효세율을 높이는 방향으로 개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일례로 우리나라의 근로소득세와 사업소득세의 경우에는 세부담이 지나치게 소수의 초고소득층에 집중돼 있다. 반면에 소득수준과 담세력에 비해 준고소득층 및 중소득층의 세부담은 매우 낮다. 넓은 세원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상위 10∼20%의 소득자가 근로·종합소득세의 90% 이상을 부담하는 구조는 우리나라 소득세 부담구조의 기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 원인은 소득세 면세점이 지나치게 높고 세제구조가 지나치게 누진체계로 이루고 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소득세의 경우에는 세율인상보다는 넓은 세원으로의 전환이 시급한 것으로 판단된다.
2000년대 이후 도입된 현금영수증, 신용카드사용액, 소득공제 등은 자영소득자들의 소득포착률 신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따라서 과세의 사각지대 축소, 즉 과표 양성화를 통한 세원확대를 위해서는 그러한 정책기조를 향후에도 계속 견지할 필요가 있다. 다만 사업소득 과표양성화에 치중한 나머지 사업소득에 대한 공제를 오랫동안 고정시킴에 따라 실효세율이 급속히 증가하지 않도록 소득공제 등을 현실화해 조정해줄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넓은 세원' 원칙의 강화를 통한 세수기반 확대를 위해서는 과세의 폭이 넓은 세원 비중을 높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나라의 세목 가운데 가장 세원분포가 넓은 것은 부가가치세이다. 부가가치세의 세율은 10%로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우리에게는 부가가치세율의 인상 여지가 있음을 시사한다.
복지제도가 잘 정비돼 있는 서구선진국에서는 복지재정 확충 및 재정건전화 등을 목적으로 높은 세율 수준(15∼25%)을 유지하고 있다. 최근에는 세율을 계속 인상하는 경향도 보이고 있다. 부가가치세율의 인상은 물가상승이라는 부작용을 갖고 있지만 넓은 세원을 통한 조세왜곡 축소 및 안정적 재정수입 확보를 통한 지속 가능한 정부의 재정역할을 보장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전향적으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현재의 세율 10%는 여타 서구선진국에 비해 현저히 낮은 만큼 '낮은 세원' 원칙을 크게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넓은 세원' 원칙에 충실할 수 있는 적절한 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인구고령화가 계속 진전되는 경우 소득과세에 대한 의존도가 장기적으로 낮아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증대된 재정수요 충족을 위해서는 세원이 넓은 세목, 즉 부가가치세의 세율 인상을 통한 세수 확충을 통해 재정문제를 해결해 온 서구선진국의 경험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본면의 외부기고는 本紙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