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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하기 2024.04.12. (금)

내국세

前정부 국세청장을 새 정부에서 다시 임명

-창간 50주년 기념 기획특집-

1993년 2월 25일, 김영삼 정부가 출범했다. 그로부터 9일만인 1993년 3월 4일 추경석 국세청장이 제 9대 국세청장에 임명됐다. 전임 대통령이 임명한 국세청장이 후임 대통령에 의해 재 신임된 사상 첫 국세청장이 탄생한 것이다. 세정가에선 이같은 사례는 세계 어느 자유경제국가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사례로 꼽힌다면서 숱한 화제를 낳았고, 국세청은 '큰 경사'로 받아들이며, '사기충천'을 마끽했다.  

 

 

새 정부에서 청장이 재신임 받은 국세청은 모든 업무능률과 조직의 활력이 배가 됐다. 노태우정부에 몸담았던 차관급 이상 공직자 중 김영삼정부에서 재신임을 받은 사람은 추경석 국세청장과 최인기 내무부 차관 단 두명이었고, 외청장 중에는 추경석 청장이 유일했다. 구구한 설명이 필요치 않은 '추경석의 위상'은 국세행정 탄력으로 이어졌다.  

 

추경석 제 9대 국세청장은 취임 직후인 3월 9일 전국세무관서장회의를 열고, 세정쇄신방안 및 투명세정을 위한 결의문과 세무공무원윤리강령을 각각 채택했다. 곧이어 세무공무원의 부정비리척결을 위한 세부실천방안을 마련했다. 자체사정을 강화하고 직원들의 사업장방문 근절과 강압적인 세무조사 근절 등을 명시했다. '국세공무원이 납세자로부터 원성을 사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요지의 이 지시는 한 달 여 뒤 추 청장이 직접 기자회견을 열어 자체사정의지를 재 천명하므로써 직원들의 경각심을 일깨웠다.

 

그 해 5월 1일부터는 '친절봉사 재확립 90일 캠페인'을 전개, 납세자가 체감할 수 있는 대민봉사를 촉구하는 한편, 세금계산서와 연말정산자료에 머물러 있던 과세자료전산디스켓 제출 대상을 '전 과세자료'로 확대했다. 대납세자 서비스 질(質)을 외형적인 친절과 함께 세무업무처리 납세자편의 확대로 개선해 나간 것이다.

 

6월1일 포항제철에 대한 세무조사결과가 나왔다. 개인증여세 56억원과 법인세 7백30억 원이 추징 됐고, 계열사에서 수십억원을 수뢰한 혐의로 박태준 전 회장을 검찰에 고발 했다. 이미 포철세무조사가 진행 중이라는 것은 세간에 알려 졌지만 막상 막대한 추징세액과 박태준 개인 비리혐의까지 적시 된 조사결과가 나오자 갖가지 억측들이 꼬리를 물었다.

 

 

그 중 정치적인 배경에 의한 세무조사라는 견해가 가장 설득력 있게 전파됐다. 그도 그럴것이 '민주화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는 정황속에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후 약 두달 여만에 '12·12사태'를 '하극상에 의한 쿠테타'로 규정했고, 노태우 정권때 실세였던 박철언 전 의원을 알선수뢰죄로 구속 했으며, 박준규 국회의장이 재산공개 파동과 관련 국회의장 사퇴서를 제출하는 등 정치성 사건들이 줄을 이었기 때문이다. 

 

포철 세무조사가 당시 정치적인 배경 때문이었는 지 아닌 지, 추 전 장관이 공사석에서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사실 여부는 현재로선 알 길이 없다. 다만 당시 포철 세무조사를 실무지휘했던 최병윤 대구지방국세청장이 서울로 올라와 국세청 기자실에서 조사결과를 발표했는데, 이는 극히 이례적인 상황이라는 점에서 포철세무조사의 무게를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국세청은 그 해 8월 17일 국세청 사상 최대규모의 직원 인사이동을 단행했다. 6급이하 국세청 전체 직원 1만3천3백5명 중 80.8%에 달하는 1만7백52명이 자리를 옮긴 것이다. 당시 직원들은 '마치 새판을 짜는 기분'이라고 했다. 직원 10명 중 8명이 움직인 초 대형 인사였는데도 '인사불만'은 거의 없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사전에 미리 파악 해 둔 직원별 연공서열과 근무평점, 연고지 등 직원현황을 인사에 엄격히 반영한 것이 주효했다고 인식됐다. 특히 새판을 짜듯 초 대형 직원인사를 무리없이 하게 된 데는 추경석 청장의 '자신감'과 '투명성'이 밑바닦에 깔려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세평이 많았다. <계속>

 

<서채규 주간> seo@tax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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