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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하기 2024.04.19. (금)

내국세

국세청, 이사관 4명, 서장급 113명 잘라내

-창간 50주년 기념 기획특집-

 

배구단 해단은 국세행정의 정체성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내부적으로는 직원들의 긴장감 조성 필요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평가도 있었다. 한마디로 국가적인 재정압박 속에서 재정수입을 책임지고 있는 국세청이 한가하게 배구놀음이나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싫었을 것이라는 의견과, 세금에 대한 국민순화 목적을 어느정도 달성 했기때문이라는 견해가 병존했다.

 

국세청은 배구단 해단 2개월 여만인 같은 해 8월 천일사에 대한 세무사찰을 전격 단행한다. 전축생산업체로 대중적인 인지도와 국민친근감이 높은 천일사 세무사찰은 경제계는 물론 국세청 직원들에게도 적잖은 충격이었지만, 세금의 사회적 긴장감 유발이라는 보이지 않는 부수효과를 거뒀다.

 

이런 일련의 분위기조성 작업은 1974년 2월 대대적인 국세청 직원인사조치로 이어진다.  

 

 

그는 1974년 2월 기강확립 차원에서 이사관급 4명과 서기관급 39명, 사무관급 70명 등 당시 서장급 113명을 한꺼번에 퇴임시켰다.
퇴직자 중엔 억울함을 느껴 고재일 청장을 3개월이나 쫒아다니며 뒷조사를 했다는 일화도 있다. 내부반발이 그만큼 컸던 것이다. 고 청장은 그러나 잘려 나간 퇴임간부 후임을 전원 내부승진자로 채워 반발을 잠재우는 묘수를 구사했다. 

 


또 제조와 유통 모두가 문제투성이인 주류문제에 손을 대 84개 소주제조사를 10여개로 줄이는 등 주세행정을 세수 위주에서 주질향상으로 전환한다. 이와함께 주류제조장별 제조비율제를 실시하는 등 주세행정을 혁신했다.

 

이 때 주류와 관련한 경영주가 내로라 하는 토호세력들이 많아 외풍도 많았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고재일 국세청장은 또 기업 길들이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기업이 협조하지 않으면 세수를 채우기란 사실상 불가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절실히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 청장은 재임 중 국세청내 최고의 엘리트직원들을 선발, 연합조사반(세무조사)을 설치한다. 연합조사반은 연간 외형 10억원 이상 법인 세무조사를 전담했다. 이로 인해 세수효과는 물론 기업들의 세금에 대한 인식을 많이 바꿔 놓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때 '세금은 짜면 나온다'는 말이 공공연히 회자되기도 했다.

 

1977년 7월 우리나라 근대 세정사에 큰 산맥인 부가가치세가 도입된다. 거래금액의 10%를 세금으로 미리 내야 한다는 점에서 사회적인 저항이 대단했다. 특히 주먹구구식의 영업세체제에 젖어 있던 납세자들은 이 부가세를 생존권과 연결 시켜 사생결단 반대 했다.

 

그런 험악한 환경속에서도 고재일 국세청장은 연일 부가세독려에 몰두한다. 국세청 간부회의는 매일 부가세로 시작해 부가세로 마감됐다. 또 일선세무서를 찾아 납세자와 직접 맞부딪치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국세행정의 집요한 법집행으로 부가세제는 서서히 자리를 잡아갔지만 곳곳에서 조세마찰이 끊이질 않았고 이는 곧 민심이반 현상으로 나타났다.

 

국세행정 혁신과 직원 근무기강 확립을 획기적으로 끌어 올린 고재일 국세청장은 부가세가 되입된 다음해인 1978년 12월 건설부장관으로 영전했다. 국세청장 재임 5년 9개월 여만이다. 국세청 사상 최장수 청장이다.  

 

후임 국세청장에는 김수학 경북도지사가 임명됐다. <계속>

 

     

 

<서채규 주간> seo@tax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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