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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하기 2024.03.29. (금)

내국세

'이낙선 국세청장 이틀에 한번 꼴로 대통령 독대…세수보고'

-稅政 50년, 稅政新聞 50년- 사진속의 세정 역사현장-<2>

-'이낙선 국세청장 이틀에 한번 꼴로 대통령 독대…세수보고'-

 

 

 

 

1966년3월3일을 기해 발족한 국세청은, 훗날 결혼예식장(노라노예식장)으로 쓰인 바 있는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한 건물에 임시청사를 마련하고, 전인미답의 국세청 조직을 하나하나 추스린다.

 

5·16 군사혁명 주체 세력 중 한 사람인 이낙선 초대 국세청장은 무소불위의 권한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위임받았고, 그 막강한 힘을 ‘국세청다운 국세청’을 만드는 데 쏟았다.

 

그는 특히 미국과 일본의 세무행정을 연상하면서 ‘국세청이 국민들의 신뢰를 받는 것이 대통령 빽보다 더 막강하다’는 점을 깨닫는다.(1966년 11월 국세청 기자단 간담회)

 

그는 개청 원년 국세청 국세행정 운영지표를 ‘세수 증대’ ‘오명불식’ ‘국민계몽’으로 정했다. 그 운영지표는 당시의 국세청의 존재 이유가 함축돼 있다.

 

첫째, 세금을 많이 거둬들이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다. 또 국민들이 세무공무원을 얼마나 불신하고 있는지를 웅변해 주고 있으며, 세금이란 무엇인지를 국민들이 알게 하는 것이 매우 시급했다는 점을 말해 주고 있다.

 

 

즉 일제의 공출(供出)시대를 거치면서 국민들 뇌리 속에는 ‘세금’은 나라에서 빼앗아 가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국민의 그 뿌리깊은 피해의식을 바꿔놓지 않고서는 세금을 제대로 거둬들일 수 없다는 현실이 반영된 것이다.

 

이낙선 국세청장은 1985년 본지와의 대담에서 국세청장 재임시에 있었던 일들을 비교적 소상히 들려줬다.

 

국세청은 개청 원년, 세수 700억원 달성을 지상과제로 삼았다. 물론 박정희 대통령의 엄중한 당부와 엄호가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세청이 발족되기 직전인 1966년 1월 재무부를 연두순시하면서 국세청 창설과 세수 700억 달성을 공표해 버린다. 정부 각 부처는 이낙선 국세청장에게 무조건적으로 협조하라는 대통령의 생각을 다시 한번 각인시킨 것이다.

 

국세청장 파워와 세수 확보의 절박성을 상징하는 게 바로 국세청장 전용 관용차량 번호 ‘서울 관 1-700번’이다. 당시 서울시내 교통경찰관이 가장 먼저 외워야 할 차량번호가 바로 국무총리 차량 번호도, 정보부장 차량번호도 아닌 국세청장 차량 번호였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결국 국세청은 같은 해 700억원 고지를 점령했다. 직전년보다 무려 66%나 세금을 더 거둬 들였다. 여기저기서 세금에 대한 불만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그러나 정보를 쥐고 있는 중앙정보부나 경찰, 검찰 어느 누구 하나 국민들의 ‘세금 불만’을 꺼내지 못했다.

 

워낙 대통령의 세수의지가 확고한 데다 세금을 많이 걷지 않으면 안된다는 공감대가 정부 각 부처내에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세청장을 이틀에 한번 꼴로 독대를 했고, 독대가 없는 날은 전화로 ‘이낙선 음성’을 들어야 안심할 정도였다고 한다. 

 

재정형편이 나아지니 국정 운영에도 자신감이 생겼다. 그 자신감은 국정운영지표가 ‘잘 살아보세’로 표출된다. 매일 아침마다  서울 경복궁을 짓누르고 떡 버티고 선 중앙청 스피커에서는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 합창이 울려 퍼졌다.

 

‘움직이는 만큼 수확이 있다’는 것을 체험한 국세청은 이 참에 세수증대 기반을 더 확실하게 다진다. 산만한 국세행정 구조를 체계적으로 꾸미기 시작한 것이다.

 

<서채규 주간>seo@tax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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