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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국세

[창간 37주년 특집] 한국세정신문 37년 지면에 비친 사회상-①

아침엔 죽 점심은 결식…세무공무원 희노애락 삼면경에


언론은 그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한국세정신문은 지난 '65.11월 창간이래 세금으로 빚어진 갖가지 사건들과 세정가에서 일어났던 희노애락의 세계를 지면에 담아왔다. 헤지고 누렇게 빛 바랜 한국세정신문 창간호부터 근래까지를 '타임머신'을 타듯 되돌려 보았다.
불혹의 나이가 머지 않은 한국세정신문의 지면을 비록 주마간산격으로나마 훑어 보면서 시대별 납세의식과 세무공무원들의 생활상, 그리고 작은 가십기사를 통해 그 시대 사회상을 읽어 볼 수 있는 편린들을 모음집으로 엮었다.<편집자 주>


프롤로그

60년대는 나라재정은 물론 납세자나 사업자 모두 빈약한 세상살이였음을 매 호마다 보여줬다. 부족한 재정 조달을 위해 불철주야 징수업무에 동원되는 국세공무원들의 애환이 곳곳에 실려 있고, 탈세자 자진신고 기간을 설정해 자수를 권유하기도 했는데, 여기에 호응이라도 하듯 많은 사업자들이 자신들이 탈세자라면 자진신고해 격세지감을 느낀다. 특히 불법적인 밀주 양조적발 기사들이 곳곳에 보여 당시 주류 양조 실상과 낙후된 주류유통 실태가 흥미롭다.

탈세를 하려는 사업자와 이를 끝까지 추적하는 세무공무원간에 쫓고 쫓기는 추적 비화와 그 과정에서 지금은 상상도 못할 체납자가 세무공무원을 폭행하거나 살인까지 하는 불행한 사건이 일기도 했다.

국세청 발족시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 휘호가 세무사찰 요원에게 하사될 정도로 세무 관련 부조리 예방을 거듭 강조할 정도였으나, 반면 '아침은 죽으로 점심은 결식'이라는 기사는 당시 어려웠던 세무공무원의 실상을 보여주는 듯 해 대조적이었다.

국세청이 체납 정리를 하는 과정에서 유명 연예인나 사업가들의 재산을 압류하는 목록들을 보면 각 시대별로 귀중한 재산목록 1호와 당시 유행 품목들을 엿볼 수 있다.

또 운행중인 버스를 압류하기 위해 종점까지 탑승해 가서 압류 봉표를 붙이는 세정가 업무 풍속도와 지금은 유수기업으로 성장한 某기업이 세금을 제때 내지 못해 고액 체납자 명단으로 랭킹 10위안에 버젓이 올라 있어 당시 기업의 어려웠던 단면을 보여준다.

본격적인 개발연대인 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조금은 허리가 펴진 듯 이젠 제법 세정가 窓들이 그럴 듯 하게 커지기 시작했고 기업들의 사옥들이 중후장대 모습으로 하나둘 출현하기 시작했다. 세수규모도 부가가치세제 도입으로 커져갔으나 한편으로는 무리한 과세로 인한 조세저항도 만만치 않았던 시대였다. 급성장해 가는 기업들에 대한 세무 사찰로 잘나가던 기업들이 무너지는 사례도 있어 국세청의  강력한 세무사찰 앞에서 살아날 기업이 없다는 유행어가 만들어 지기도 했다. 세정당국과 사업자간 기장문제가 숙제로 대두됐고 금전등록기가 첫선을 보여 한국 유통업계에 주판알 시대에서 계산기 시대로 전환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또한 세무대학이 설립돼 국세ㆍ관세 공무원을 양성해 졸업후 국세청과 관세청 8급으로 임용, 세무행정 기관의 인적 구성 계층이 다양화되기 시작했다. 

유신정권이 붕괴된 채 시작된 80년대는 한마디로 비약적인 성장속에 권위주의가 자리잡은 한 시대였다. 신 군부 출현으로 대대적인 사회정화운동이 시작되자 세정가는 사정한파가 엄습했고, 일부 세무서 직원들이 무더기로 잡혀들어가는 사태가 일기도 했다. 이후 국세ㆍ관세ㆍ지방세 행정조직 규모가 커지게 됐고 종사 직원수도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해 왔다. 이같은 추세와 함께 세정도 친절세정을 표방했고, 경제규모 확대로 인해 세무대리인의 업무 역할이 중요시 되고 이들에 대한 주가가 높아지는 시대였다. 반면 세무자료상들이 활개를 쳐 세무당국이 골머리를 앓을 정도였고 각종 세무신고시 '물조정'이란 유행어가 생기기도 했다.

90년대 화두는 군사정권에서 문민정권으로의 변화였다. 국세청 역시 정권 교체 의미를 상징하듯 종전까지 군 출신 인물이나 재무부 인사가 국세청의 수장을 맡아왔던 관행을 깨고 내부 승진 테이프를 끊음으로써 지금까지도 국세청장은 국세맨이 맡는다는 관행을 만든 연대였다. 대 재벌그룹에 대한 세무조사가 실시되는 한편, 세무조사 성역으로 치부되던 언론사에 대해 김영삼 정권과 김대중 정권 모두 세무조사를 실시했다는 점은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언론사 세무조사에 대한 세정당국의 대처방법과 국민들의 반응은 많은 교훈을 남긴 예가 됐다.

IMF구제금융 신청을 계기로 세정가 풍속도도 확연히 달라졌다. 대대적인 공공부문 구조조정을 이유로 중ㆍ하위직 직원들이 대거 명퇴를 했는가 하면 기업들이 세정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졌다. 조직도 대폭 축소되고 기업들이나 개인납세자에 대한 과거 권위적 세무 지도 등도 사실상 약화 현상이 나타났다. 국세청 차장이 세풍사건으로 지금도 매스컴에 오르내리고 있고 이후 이른바 정도세정을 표방한 국세행정이 국민들의 박수 갈채를 받으면 화려하게 등장했으나 정도세정의 주역이 재산증식 의혹이라는 언론의 십자포화를 맞아 결국 국세행정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60년대

"홍차는 무관ㆍ커피는 거절"
세무조사요원 처신 요령


○…'66년 벽두 일부 국세공무원들의 실생활상을 전해 주는 뉴스가 지면 한 모서리를 채우고 있다.

기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청렴하다 못해 끼니마저 제대로 잇고 있지 못하는 세무공무원이 한 세무서에 네명이나 돼 비참하다'는 기사가 바로 그것.

'아침은 죽 점심은 결식' 제목의 이 기사는 사회 일각에서 부정부패의 온상으로 비난받고 있는 시각을 '타성적 비난과는 정반대' 현실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당시 조진희 대전사세청장은 대책 마련을 지시하고 논산세무서 등으로부터 모두 8천여원의 성금을 모금해 논산세무서 김희곤ㆍ박종상ㆍ이용운ㆍ이재식씨 등 4명에게 성금을 전달했다.

또 일본 大阪 국세청이 세무사찰 요원들에게 내린 규준 지시사항을 보도했다. 오늘로 말하자면  공무원 윤리 강령인 셈이다.

'66.1.17자 한국세정신문에 '홍차는 무관하나 커피는 거절하라'는 세무조사 요원들의 처신 요령이었다.

○…이때 정부와 일선 세무서에서는 국세청 신설과 관련해 그 조직과 역할에 대해 각계 각층의 논의가 활발했다. 어떤 이는 세무 사찰을 강화해야 한다는 강경파 주장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세무공무원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지면에 주장으로 싣고 있어 지금도 제정되지 않은 '국세공무원특별법' 제정에 대한 염원이 당시에도 컸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66.3.7자에는 국세청 개청 인사에 얽힌 뒷얘기들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재무부 세정차관보 下馬評은 김동수 당시 재무부 공무원교육원장과 정소영씨(후일 농림부 장관)간에 치열한 경합을 벌였으나 의외로 정소영씨가 차관보로 낙점. 김동수씨가 낙마하게 된 배경을 '모종의 사건이 있었기 때문'으로 당시 3월7일자 신문 삼면경 가십 기사는 기록하고 있다. 

한직으로 여겨졌던 재무부 교육원장 자리를 놓고 다시 '감투쟁탈전에 아연실색'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이 중 당시 장재식  재무부 세제2과장(후일 국세청 차장과 산업자원부 장관 역임)과 이달형 국세청 간세국장, 남상진 재무부 세제1과장 3인이 의외의 치열한 경합을 벌였으나 결국 당시 김동수 원장의 유임으로 매듭지어졌다는 등 관료들간의 인사 뒷배경에 대해 미주알 고주알 쓰고 있어 인사 배경에 대한 뒷얘기는 예나 지금이나 호사가들의 얘기거리임을 말해 주고 있다. 

○…'66.3.28자에서 눈에 띠는 기사 한 토막.

세정사에서 지금도 거론되고 있는 금은방 주인들의 납세저항 운동과 관련된 어느 인사의 무용담이다. 

당시 임영득 소공세무서장의 취임 인터뷰 기사에서 '우정있는 설득'을 한 세무서장으로 제목을 뽑았다. 이유는 당시 소공동에 몰려 있는 금은방 사업자들이 세금을 못내겠다며 항의하고 상가 철시를 하는 등의 시위가 발생하자 한번은 치러야 할 세정상의 홍역이라고 관할세무서장으로서 소견을 말하면서 거세게 저항하는 금은방 사업자들을 지혜롭게 설득해 정상적인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는 내용.

임영득 당시 소공세무서장은 행정고시 사법고시 양과를 합격해 재무부 국유재산과장을 지내다 소공세무서장으로 부임했다. 후일 국회의원과 한국세무사회장을 역임했고, 지금도 현직 변호사로 활약중이다. 

한편 당시 화폐단위는 원단위인데도 불구하고 실제 원가계산시나 각종 요금을 매기는데 錢단위가 통용되고 있어 일반 이용자들이 錢단위의 거스름돈을 받지 못해서 사실상 막대한 금액의 세금를 추가로 더 내고 있다고 고발하는 기사가 실려 있다.

"탈세정보는 모두 국세청으로"
朴대통령 지시, 사기 충천


○…'66.4.18자는 박정희 대통령이 모든 세무사찰 활동을 국세청으로 일원화하라고 지시했다는 뉴스를 톱으로 뽑았다.

특히 탈세정보는 입수단계에서 국세청에 인계해 처리할 것을 지시했다. 물론 검찰이나 수사기관에 들어온 첩보도 모두 국세청에 인계해 일원화하도록 하는 조치를 대통령이 직접 지시함으로 써 국세청에 힘을 실어줬다는 점에서 오늘의 현실과 대비해 볼 수 있는 점이다.

'66.6월경 한국세정신문은 국세청의 체납 일소특단책에 대해 자세히 쓰고 있는데, 특히 눈에 띠는 건 '탈세자진신고기간'이라는 캠페인.

한달반여 기간의 탈세 자진신고 기간을 설정하고 이 기간에 소위 자수하는 납세자에게는 추가 신고한 것으로 보고 처벌을 하지 않겠다는 특단의 조치로 당시 이철성 광주지방국세청장은 '체납 일소의 달' 담화문을 발표하는가 하면 탈세 자진신고와 관련 기자 간담회에서 '탈세란 포탈한 세금을 잊어버리고 내지 않은 것'이라고 설명해 현재의 규정에 비춰 보면 코믹하기도 하고 애교스런 표현이다.

한편 성실납세 계도와 관련해 그는 '이국 월남땅에서 자유 수호를 위해서 싸우고 있는 우리 국군 장병들도 누구나가 세금을 내고 있다'며 일부 부유층과 사업자들의 성실납세 분위기를 파월장병들의 애국심을 빌어 호소하고 있어 당시 파월장병의 국위선양 역할이 세정에도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음을 반증했다. 

○…한편 大田 소재 주정회사에 근무하는 2명의 직원이 해고당하자 그 보복으로 그 회사 상급자 및 간부들이 그동안 주정을 빼돌려 암거래한 사실을 국세청에 제보하자 대대적인 사찰에 착수했다는 소식이 보여 당시 주류 밀주조와 암거래가 만연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66년 국세청 개청이래 최초의 전국 세무서장회의에서 사찰은 영장이 필요없고 신분증으로 대체할 것임을 시달하고, 특히 이날 이낙선 국세청장은 '서서 받는 세금'에서 '앉아서 받는 세금방식'으로 개선을 기대했다.

또 전국 세무조사과 발족식 및 제1차 조사 사찰관계관회의에서는 '見金如石'이란 노란색 글자가 새겨진 녹색타이와 휴대용 특제 가방이 각각에게 지급됐는데 見金如石이란 글귀는 박정희 대통령이 이낙선 초대 국세청장에게 하사한 휘호 중 네글자를 복사해 새긴 것이었고, 사찰요원 特製 가방속에는 소위 '황금쿠폰'이 들어 있었는데 현금과 같이 사용되는 은행발행액면권이 들어 있었다. 그만큼 금전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는 점을 강조한 것인데 현재 세무조사관의 처우가 당시의 위상과 많이 달라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66.6.27자 3면에 '병아리 세무공무원-18세의 앳띤 발군' 제목의 상자 기사에서 약관도 안 된 18세 세무공무원을 소개하고 있다. 충북 영동군 학산면 반계리 462번지에 본적을 둔 박종복씨가 바로 그 주인공.

기사 내용을 인용하면 학산상고를 졸업한 박씨는 서울로 상경, 아버지 일을 돕다 시험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단 일주일간 공부해 수많은 대학졸업자들과 경쟁해 당시 5급 공채(現 9급) 시험에 거뜬히 합격한 것. 18살에 세무공무원으로 소공세무서에서 첫 근무를 시작한 박종복씨는 지금 현직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여서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불명.

한편 세수목표 달성을 위한 체납정리를 극구 강조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서대전세무서는 고작 자전거 한대 밖에 없어 기동성이 떨어진다면서 체납정리 고충을 호소하는 기사가 당시 세무공무원들의 애환을 엿볼 수 있는 단면이다. 

○…당시 체납정리를 하는 과정에서 압류물품 면세가 낱낱이 발표되고 있어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기록들이다.

당시 인기 스타 최무룡ㆍ강효실 부부에 대해 시가 20만원 상당의 자개장롱 텔레비전을, 박노식씨에 대해서는 전화 가입권을, 파월장병 위문차 월남으로 출국하려던 배우 허장강씨에 대해서는 세금 체납을 이유로 출국정지를 했으나 완납후 출국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국세공무원은 아침 9시에 출근해 오후 9시에 퇴근하는 체납특명반을 편성하는 한편, 이동 국세청을 가동하는 등 일선 세무서는 아침부터 오후까지 텅 비어 있었고, 저녁 무렵에야 직원들이 돌아와 업무를 챙기는 모습을 '밤낮이 바뀐 세무서'라는 사진으로 싣고 있다.

연도말 세밑 국세공무원이 인천한국공업회사에 대해 법인세와 소득세 체납처분을 집행키 위해 공장을 방문했으나 직원들이 쇠망치를 휘두르며 협박, 봉변을 당하는 상황에 처했으나 기지를 발휘해 전동기를 압류 후 협상에 들어가 밀린 세금 700만원 모두를 징수하는 등 당시 밀린 세금을 받아 세수를 확보하는 업무는 지상과제였음을 여실히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논산세무서 연무대 관할 갱생회 탈세사건을 조사하던 직원이 보복 구타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군용열차내 매판원의 상납 고리와 수입금액의 상습적인 탈루에 대해 군관계자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실액과세했다는 무용담이 실려 있다.

○…세원 발굴본부 발대식에서 이철성 서울청장은 '사찰을 한번 당하게 되면 파산한다는 인식을 갖게 하라!'고 엄명을 내렸는데 최근 들어 달라진 세무조사 지침에 비하면 서릿발이 내릴 지경으로 비유될 정도의 査察觀이다.

부산지방국세청은 당시 제일모직에 대한 감사에서 중앙일보, 중앙라디오 등등에 무상 증자에 참여, 출자했으나 이를 사채를 쓴 것으로 기장했는데도 불구하고 부산청은 이를 부인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한 것이 드러나 3억6천여만원의 누락분에 대해 모두 8천900만원의 세금을 추징했다.

이즈음 국세청은 재벌기업과 매점매석을 일삼는 폭리업체를 대상으로 전담 연구관제를 도입하는 등 강력한 조치를 취하게 되는데, 특히 몇몇 인기 품목들을 독과점으로 생산하고 있는 당시 재벌과 대기업들에 대해 사찰요원을 대거 투입시켰다는 뉴스와 호화ㆍ사치생활자에 대한 강력한 체납정리 기사 빈번히 등장하고 있어 예나 지금이나 가진 자들의 세금 안 내고 버티기는 여전한 것임을 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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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3.3 국세청 개청 테이프를 끊는 개청식 사진과 함께 대대적인 인사이동 속보 기사를 1면 톱으로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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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개발정책이 본격 집행될 때인 70년대 '총화세정'이란 박정희 대통령 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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